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9 – 다시 간 만영재
달그락 달그락
조심스러운 설거지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잠시 후 딸깍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면 몬스테라와 벵갈 고무나무와 접란이 있는 집안은 고요하다.
잠시 빌린 어두운 방은 관 속 같고 누워있는 나는 잠자는 도시의 공주 같다.
2021년 마지막 날에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나와서 2022년 첫날부터 하동에서 부산까지 200여 km 도보 순례를 열흘간 마치고 올라온 서울. 정기검진과 종합건강검진과 자동차검사를 했다. 예약이 밀려 두 주나 걸렸다.
그사이 깔끔하고 따뜻하고 안락한 서울 생활은 편리하고 달콤한 자본의 풍요로 나를 삽시간에 순례자에서 원래의 서울시민으로 만들었다. 인터넷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되는 유기농 생협 물품들이 차 있는 냉장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신용카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휴식. 더 있다가는 누에고치처럼 꼼짝도 못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벗어난 자본의 굴레인데……. 갑갑하게 고여있는 안정보다 자유롭게 흐르는 순례를 택한 삶 아니던가. 대자연의 풍광을 온몸으로 맡던 내가 창밖에 보이는 남의 집 옥상 위에 모르는 사람이 수시로 올라와 담배 피우는 광경을 관음증도 아닌데 볼 수밖에 없는 서울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꼼꼼하게 나와 내 차 탈핵브리드를 샅샅이 검사하고, 깨끗하고 건강한 우리는 풀지 않은 짐을 다시 싣고 길을 떠났다.
마침 1월 25일 화요일, 탈핵대선연대에서 하는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및 특별법안 철회 촉구 전국행동’이 여의도에서 있었다.
서울에서 할 일을 마치고 그 길로 청명을 태우고 충청북도 청주시로 갔다.
청명은 냉장고도 세탁기도 없이 산다. 트렁크와 배낭 둘과 좌식 탁자와 기도 의자와 자전거와 최소한의 주방용품이 청명의 집기이다. 20분이면 이사할 수 있다. 휴지도 쓰지 않는다. 물로 용변을 처리한다. 그런 청명의 30cm 이상 꿰맨 낡은 내복 바지를 이번 도보순례 때 보았기에 미리 내의를 선물로 준비해 갔다. 계절별로 옷이 두 벌씩만 있는 청명이지만 낡아서 찢어진 걸 언제까지 입을 순 없으니, 이 정도는 받겠지 싶었다. 그런데 청명이 흔쾌히 열어본 상자에는 윗옷만 있었다. 내복은 보통 상하 한 벌로 팔지 않나? 인터넷쇼핑을 오래 안 한 내가 물건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탓이었다. 당황해서 내 여벌의 내의를 주겠다고 했다. 리현이 작아서 버리는 걸 챙긴 거라 사이즈가 85였는데 청명이 입어 보나 마나 안 맞는다고 했다. 입고 있던 90짜리 내의를 벗어주려고 욕실로 갔는데 거울에 비친 내 상의 역시 오래 입어 올이 성글어져 속이 비쳤다. 웃음만 나왔다. 우리는 남은 밤에 비움에 관한 사고와 행동 양식을 점검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청명의 직장 앞에서 헤어졌다.
충청남도 공주시 우금티로 향했다.
동학혁명의 큰 싸움터였던 ‘우금치’를 공주사람들이 원래 사용했던 ‘우금티’로 표기하고 있었다. 공주 시내를 관통해 다다른 산자락 우금티에서는 1894년 11월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아래 이인역에서부터 우금티를 넘어야 했던 동학농민군들의 기세가. 마침 그날 진격이 시작된 시각과 같은 오전 10시였다.
알림터에서 해설을 듣고 보고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지나 이슬이 촉촉한 터널 위 잔디를 걸어 산등성이까지 올라갔다. 등산화가 아닌 털고무신을 신고 있어 두리봉과 주미산까지 가볼 수는 없었지만, 그 땅에서 있었던 혈전의 숭고한 기개와 낙엽처럼 스러진 농민들의 고결한 혁명정신이 그 옛날 피에 젖은 흙에서 모락모락 솟아 올라왔다.
내가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이유는 다시 정읍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였다.
처음은 재작년 늦여름의 배롱나무를 구하던 8, 9월.
다음은 작년 초인 겨울부터 추위와 외로움과 싸우며 요양보호를 배우고 요양보호사를 하던 봄과 초여름까지의 1월부터 6월까지. 그때 만석보와 전봉준 장군 단소와 고택을 가보며 걷고 싶었던, 정읍 동학농민혁명 <샘솟길>. 그 길을 걷기 위해 정읍으로 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정읍시에 들어서자마자 정읍시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만영재로 곧장 가면 월요일 도보순례 외엔 꼼짝도 안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원하는 책들을 대출하고 없는 책을 예약하고, 작년에 참가한 <2021년 책읽기 마라톤대회> 개인 10km 코스 완주증서와 기념품을 받았다.
원조 정읍댁의 친절한 문자 환대로 들어선 만영재에는 강전정된 나무들이 앙상하게 우뚝 서 있었다. 맨 먼저 상추를 심었던 자리에 가보았다. 텃밭에 네모나게 그어놓았던 줄은 흔적도 없고 잡초와 전정된 가지들이 쌓여있었다. 정원의 배롱나무 뒤 두릅나무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고 뉘어놓았던 능소화가 줄기를 담 양쪽으로 뻗고 있었다. 노랑붓꽃 뭉치도 싹둑 잘렸다. 본채 초록 테라스 난간에 그대로 앉아있는 나무 닭과 원숭이에게 “안녕”하고는 쓰다듬어 거미줄을 떼어주었다.
전기계량기를 검침하고 기름보일러를 틀고 난 후 차 안의 짐을 사랑채로 옮기는 데 한참이 걸렸다. 짐을 싸고 푸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그래도 짐을 푸는 곳은 얼마간이라도 내가 살 집이니 깨끗하게 청소한다. 빗자루로 현관을 쓸고 실내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바닥 걸레질을 하고 창틀까지 싹싹 닦는다. 맨 처음이라 청소기를 돌리지, 있는 동안 전기를 아끼기 위해 걸레만으로 청소하리라 마음먹는다.
두서없는 청소로 일이 늘어지자 허기가 졌다.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이는 나는 국수인지 떡인지 모르게 우리밀 라면을 끓였다. 갖고 다니던 식품을 소진하고 짐을 줄여야 했다.
라면을 끓이는 사이, 리현이 이른 생일선물로 주문해 준 커피 드리퍼와 컵이 만영재 입주를 환영하듯 도착했다. 이번에도 짐을 챙기면서 고민한 게 커피였다.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는 친구들이 부쳐준 드립백 커피를 아껴 마시며 주로 믹스커피에 무항생제 우유를 섞어 마시는 게 나만의 소소한 품위 유지였다. 드립백 커피보다 경제적인 원두커피로 바꾸려고 고민 끝에 결정한 선물이었지만 짐이 느는 건 어쩔 수 없다. 종이필터를 쓰지 않으려고 스테인리스 드리퍼를 선택했는데 부피가 크고 무게가 나간다. 캠핑용이라 일상생활에선 조금 불편할 듯도 하다. 그래도 군용처럼 투박한 디자인과 카키색은 고전적이다.
해남 백련재에서 TV를 덮었던 녹색 요가 타월을 책상 위에 깔고, 친우가 작년에 정읍으로 보내준 하얀 CD 플레이어 겸 라디오로 주파수를 잡아 보았다. 해남에서는 목포 것도 제주 것도 잡히지 않았던 KBS 클래식이 100.7 FM으로 나왔다. 이제 휴대전화기 앱으로 라디오를 듣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다른 사람 방해하지나 않을까 조심하지 않고 틀 수 있어서 등이 좀 펴진다.
창 너머로 해가 졌다. 첫날이라 추우면 외로울까 봐 보일러를 20도 웃돌게 땠다. 먼지 뒤집어쓴 몸을 씻고 애장품 경대와 화장품을 가지런히 놓았다. 일 년 사이 공정무역 스킨과 로션과 앰플 두 병이 사라졌다. 그리고 선목이 선물한 화장품 세트가 생겼다. 미색 면 시트 부피가 커서 이번에 새로 마련한 짙푸른 캠핑용 면 시트를 깔았다. 젖은 머리칼로 잠깐 누웠는데 장거리 운전으로 피곤해선지 깜빡 잠들었다.
몇 시간 후 깨서 누룽지를 뿌옇게 끓여 한 대접 먹었다. 커튼을 살짝 젖히고 빼꼼히 내다 본 누런 잔디가 흰 눈 같다. 가로등 빛을 받았나 보다.
피터가 해남으로 선물해 준 주황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도반이 해남으로 부쳐준 얼 그레이 차를 한 잔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노트북을 켜고 한글 파일을 열었다. 작년 말 백련재에서 나와서 처음이니 26일 만이다. 열흘간의 도보순례 기간에 쓸 수 없었음은 당연하고, 두 주 간 서울에서 내가 쓴 거라곤 간단한 업무용 이메일과 다시 쓴 자필유서뿐이었다.
수년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근래에는 ‘만약 3개월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종종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모리의 정원>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정원과 텃밭을 가꾸고 손잡고 산책하며 <전망 좋은 방>에서 글 쓰는 삶을 꿈꾼다. 죽기 전에 석 달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스러운 인생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3년, 30년 뒤를 염려하여 오늘을 행복하지 못하게 살고 있다. 행복하지 않을 뿐 불행하진 않다고 자위하며, 헤어짐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고 남의 눈이 무서워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서울에서 있던 두 주간 일곱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그중 SCROFA의 <The Womkind>와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1, 2>는 사랑과 산업화와 자본에 관한 생각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몇 가지 독특할 것 없는 감정들의 총합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우상화하는 것은 동화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사랑은 ‘저항할 수 없는 마법적인’ 감정보다는, 성관계가 가능하고, 감정적인 친밀감을 느낄 수 있으며,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어 오랫동안 독점적인 관계를 유지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찾는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행위에 가깝다’
SCROFA의 이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를 주룩주룩 울게 한 책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흔히 그 책을 성애소설로 알고 있는데 작가는 남녀의 사랑이라는 당의정을 통해 탈산업화, 탈계급, 탈권력, 탈자본을 말하고 있었다.
“......뭔가 다른 거슬 위해 살자. 우리 자시늘 위해서든 다른 누구를 위한 거시든, 돈만 벌기 위해서 사는 삶을 그만두자. 지금 우리는 그러케 살도록 강요받고 있따. 우리 자시늘 위해서 눈꼽만큼 벌고 사장드레겐 거액을 버러다 바치면서 그러케 살도록 강요받고 있따. 이제 그런 삶을 그만두자! 조금씩. 그걸 멈춰나가자. 고래고래 소리치며 떠드러댈 피료가 업따. 그저 조금씩, 산업에 물든 그 모든 삶을 떨쳐버리고 본연으로 도라가자. 돈은 아주 최소한만 이쓰면 충분할 거시다. 이게 모든 사람믈, 나와 당신, 사장과 주인, 심지어 왕까지도 위하는 일이다. 돈은 정말 아주 최소한만 이쓰면 된다. 그저 그러케 하기로 결심만 해라. 그러면 당신네드른 이 더러운 수렁에서 헤어 나올 쑤 이께 된다.”
이것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눈 뒤 사냥터지기가 채털리 부인에게 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28년 출판 당시에 이런 혁명적인 사고는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은 세기를 넘어서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순결한 감정이다. 그것은 계급과 권력과 자본의 구조를 능히 넘어설 수 있는 생명력이 있다.
한편 성관계를 하고 감정적인 친밀감을 느끼고 오래 독점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쁜가? 그것이 왜 ‘저항할 수 없는 마법적인’ 감정이 아닌가?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가? ‘성욕, 친밀감, 그리고 헌신의 합집합인 현대적인 사랑의 관념’에서 헌신을 제외하거나 헌신을 포함해서 제도화하는 순간, 그것은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행위’가 된다. 그러나 세상에 무목적 사랑이 있나? 사랑이시라는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자기만족이 있으셨다. 여하튼 사랑은 애써 폄하할 것도 숭상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일부러 멀리할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없었다면 인류는 종족을 유지하지도 못했고 문화의 번영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 년도 겨우 사는 인간이, 그리고 사는 동안 계속 변화하는 인간이 풋내기 시절에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건 사회제도 유지 틀에 구성원으로 끼워 맞춰지는, 그야말로 ‘동화적인 상상’을 강요받는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늙어서까지 손잡고 걷고 싶어 하다니 ‘만약 3개월만 산다면?’이라고 종종 상정하는 나조차도 얼마나 상충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늙어서까지 손잡고 싶지도 않은 사람과 3개월이나 어떻게 함께 하겠나.
나는 저 천국의 영화를 바라며 이 땅에서 금욕하고 고행하는 삶을 버렸다. 그러자 진짜 자발적 고행이 시작되었다. 남들에게는 고행으로 보이는 이것이 내게는 행복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나중도 보장할 수 없다. 내일 일도 모르는 인생 아닌가.
술을 마시지 않아도 <Another Round>는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도 혼자다. 어쩌면 혼자라서 글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차피 타인이라 내 마음이나 의지대로 존재할 수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기 위한 방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 방에 정원이 딸려 있으면 금상첨화이니 만영재는 나의 첫 번째 정원일기 배경이자 시작부터 다소 호화로웠던 방이다. 작년보다 보름 늦게 입주했는데 덜 춥다. 오래 머물 예정은 아니지만 5개월의 집필촌 생활로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기에 만영재는 적소이다. 사랑채는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더더욱 좋다.
이제 나는 그다지 외롭지 않다. 다만 고독할 뿐이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정원이 있는 방을 찾아다니는 이 시간이 어찌 쓸쓸하랴. 용기 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귀에 익은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지난 밤 어둠이 무서워 틀고 잔 라디오에서 나오는 진행자의 소리다. 하얀 커튼 앞 금속공예작품 ‘자화상’의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둥근 조형선이 예쁘다. 스트레칭을 하고 108배를 하려다 33배만 한다.
전날 먹고 남아 퉁퉁 불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다시 끓여 신김치와 멸치볶음과 먹자니 기분이 처진다. 싱크대 안에서 먼지 쌓인 파란 도자기 접시를 꺼내 뽀득뽀득 닦아 빨간 사과와 연노란 바나나와 하얗고 노랗게 삶은 달걀을 각각 잘라서 올려놓는다. 색깔만으로도 상쾌하다. 전날 온 드리퍼에 원두를 갈아 넣고 시음해 본다. 미분이 있으나 맛은 좋은 편이다. 뚜껑을 덮은 채 마실 수 있는 컵은 온도를 좀 더 유지해 준다. 캠핑용 스테인리스와 도자기, 둘에서 세 개로 컵이 늘어 잠시 부담스러웠으나 손님 둘이 와도 함께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괜찮아졌다.
어디선가 길고양이가 들어와 초록 테라스를 지나 깡뚱해진 소나무 뒤 돌담 위 기와에 앉았다. 해남 백련재 까하가 기억났다. 내 방 창 밑에서 “야옹”하고 나를 부르고는 내가 창문을 열면 햇살 아래 뱅그르르 한 바퀴 구르고 나서 가만히 앉아 간식 줄 때까지 올려다보며 기다리던 까하. 그리고 회와 연재…….
여기선 절대 정 주지 않으리. 누구에게도 아무것에도.
그러나 내 눈길은 창밖 배롱나무 두 그루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다시 어둠이 내리고 두려움과 볼에 닿는 냉기를 피하려 이불을 쓴 채 꼼짝 않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을 때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창가의 ‘자화상’ 속 외로운 사람이 둘이 돼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각도에 따라 한 사람이 배경을 나눠 둘이 된 공간이 빛을 투과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둘이 되는구나.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일으켜 커피 원두를 갈고 식빵을 굽고 사과를 잘랐다. 이부자리와 빨래를 햇볕에 널었다. 정원의 굽은 소나무가 씩씩하다.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