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혜의 뉴욕 스토리 47 -
빨간 등대의 고향을 찾아서 : 겨울바다, 샌디 훅(Sandy Hook)
Sue Cho, “Roaring waves in winter sea”, 2022, Digital Painting
허드슨 파크웨이(Hudson Parkway)를 타고 조지 워싱턴 브리지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유심히 차창 밖을 본다. 혹시 빨간등대(Little Red Lighthouse)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리 교각을 지나가다 아주 짧은 순간에 스치듯 깜빡이는 빨간 등대를 볼 수 있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자전거를 타고 등대까지 왔던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눈에 잘 안 띄지만, 늘 거기 있고 작은 불빛을 밝혀주는 빨간 등대! 겨울 바다가 그리운 12월, 친정 나들이를 다녀오는 마음으로 빨간등대의 고향 샌디 훅(Sandy Hook, New Jersey)을 찾았다.
이날 하늘은 묘하다. 구름은 수직으로 하늘을 땅 끝까지 가르고, 또 어는 틈엔가 구름을 푸른 빛으로 물들이며 태양은 얼굴을 드러낸다. 한겨울 쨍한 날의 블루가 좋다. 하늘도 바다도. 호쿠사이의 “파도”를 연상하는 그 블루.
샌디 훅(Sandy Hook)은 뉴저지 해안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2,000에이커의 당근 모양으로 뛰쳐나온 반도이다. 모래사장이 고운 해변, 등대, 포트 핸콕(Fort Hancock) 군사요새의 유적, 선셋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와 만으로 이어지는 양쪽 해변, 짠물과 민물 늪지대,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전거와 하이킹 트레일을 따라 이곳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여름철엔(메모리얼 데이에서 노동절까지) 맨해튼 35가 이스트 리버와 월 스트리트 선착장에서 Seastreak 고속페리를 타면 불과 35분이면 올 수 있어 여름철 뉴요커들이 즐겨 찾는 비치라고 한다.
https://www.nps.gov/gate/planyourvisit/sandy-hook.htm
샌디 훅 등대(Sandy Hook Light House)는 1764년에 지어졌는데, 작동하는 등대 중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라고 한다. 이 당시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배가 가장 안전하게 항해를 하는 길은 수심이 깊은 이 등대 연안을 끼고 오는 길이었다. 안전을 위해 이 등대 주변에 두개의 작은 등대가 후에 더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현재 조지 워싱턴 다리 밑에 있는 빨간등대라고 한다. 빨간등대는 1880년에 세워졌다가 1917년 해체되었고 1921년 부터 맨해튼 제프리 훅(Jeffrey Hook), 지금의 Fort Washington Park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가 빨간등대의 친정집이라 할 수 있다. 등대 바로 옆에는 1883년 지어진 등대지기 집(The Lighthouse Keepers Quarters)이 있는데 지금은 방문객을 위한 안내소(the Sandy Hook Visitor Center)로 쓰이고 있다.
등대가 해안선 근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육지로 깊숙이 들어와 있을까 의아했다. 원래 해변에서 500피트(150m) 떨어진 곳에 세워졌는데, 자연의 변화( longshore current가 오랜 세월 북서쪽으로 모래를 옮겨)로 지금은 1.5 마일(2.4 km)이나 해변과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런 모진 세월과 풍파를 견디며 서 있는 등대가 대견하다. “등대지기” 노래를 불러본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https://www.youtube.com/watch?v=zqUtxilTl7U
해변을 걸어보았다. 화가 Athena Kim이 “뉴욕 근교의 명사십리”라고 추천해 준대로 모래가 곱고 드넓었다. 멀리 북쪽으로 뉴욕시가 보인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속초 의상대(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엄마 얼굴이. 난 그때 바다가 그저 그랬는데, 지금 엄마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보게 된다. 무심히 하염없이 바다를 본다.
마음의 돌덩이를 바다에 내동댕이쳐도
바다는 다 받아준다.
묻지도 않고
산산조각으로
파도에 실어 보내고
동글동글한 자갈을
선물로 남긴다.
샌디 훅은 뉴욕항과 대서양을 보호하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는데, 포트 핸콕(Fort Hancock)의 폐허가 된 잔해, 대포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미 독립 전쟁 때에는 영국군이 등대를 장악하기도 하고 세계대전 때에는 뉴욕항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등대의 불빛을 꺼놓기도 했다고 한다. 안쪽 베이를 따라 지금은 버려진 장교 숙소들이 쭉 늘어서 있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과 함께 노을빛이 자아내는 실루엣이 멋지다. 석양은 폐허조차 아름답게 한다. 집으로 오는 길에 선셋을 사진에 담았는데 자세히 보니 두 군데 등대의 불빛이 보인다. 근처에 있는 쌍둥이 등대(Navesink Twin Lights)가 우연히 사진에 잡힌 것이다. 세렌디 피티!(한국말론 웬 떡이냐!)
겨울 바다에 한 번씩 몸이 오고 싶은 것은 나를 비우고 싶은 무의식적 리튜얼인가 보다. 빈 마음, 동그란 마음이 되어 새로운 한 해를 담을 수 있게. 굳이 묵혔다 일 년을 채우지 말고 나의 의식이 알아챘으니 틈틈이 가까운 바다를 찾고 싶다. 생각보다 주변에 많은 등대를 길잡이 삼으면서.
PS 1.
가을에 뉴저지 해안에 있는 등대 10군데를 개방하는 “Lighthouse Challenge”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PS 2.
Sue Cho, “Surfers by the Lighthouse”, 2022, Digital Painting
수(Sue)는 고수다.
“아니 겨울바다인데 이렇게 발가 벗기면 우짜요?(나의 엉터리 부산 사투리로)
“황량하게 텅비게…”
그런데 한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겨울바다 속에 서핑을 즐기는 상상,
기쁨이 오리라는 희망,
이 막막함을 밝게 해준다.
수(Sue)에게 한 수 배운다.
황량한 나의 마음을
더한 황량한 겨울바다로 위로 받으려 하는데,
수는 겨울에도 여름을 산다.
아무튼 수(Sue)는 고수다.
롱아일랜드 바닷가에서 얼마 전 댈라스로 이사 간 수(Sue),
텍사스 빛깔이 스며드는 새로운 그림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