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불)가능성
세상에는 여러 음악이 있다. 악보가 아닌 신체로부터 출발해 완성되는 음악, 신체에서 신체로 전승되는 음악, 음의 떨림과 이동이 중요한 음악, 음색이나 텍스쳐가 중심이 되는 음악, 심지어 문학, 춤, 연극, 의례의 경계에 놓여 특정 장르로 말끔하게 분리되지 않는 음악도 있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무형의 소리를 재료로 한 결과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음악도 있다. 음악을 정의하려는 숱한 시도를 보았지만, 내 생각에 음악을 정의하거나 음악을 성립하게 만드는 조건을 제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마는 것 같다.
새삼스럽게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그간 체감한 대화의 어려움 탓이다. 음악에 관한 대화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보통의 대화는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하더라도 같은 곳에 도착하곤 했지만, 음악에 관한 대화는 같은 곳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곳에 도착하는 일이 잦았다. 때때로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만큼이나 각자 상상하는 음악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면 서양음악이 아닌 국악을 기본값으로 하는 대화는 거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국악이 서양음악과 얼마나 다른지 구구절절 부연하며 끝나기 일쑤였다. 나의 신체도 국악의 언어가 아니라 서양음악의 언어로 국악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야 했다. 얼마나 다른지에 집중할수록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음악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서양음악 전문가는 음악 전반에 대한 발언권을 얻지만, 국악 전문가는 국악에 대한 발언권만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국악은 음악의 ‘일부’일 뿐 음악 자체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국악은 거대한 음악사의 시작이 아닌 마지막에 위치하는 음악, 서구가 ‘다양성’이라는 윤리적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해 동원하는 음악, 철저한 변방으로서 근근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음악일 뿐이었다.
음악에 관한 좋은 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고정관념이 무엇인지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대화의 장에서 서양음악에 대한 관념은 상식이 된다. 내가 선택한 전략은 ‘국악’ 대신 ‘음악’을 의도적으로 쓰는 것이었다. 나는 ‘국악’을 써야 하는 자리에 ‘음악’을 쓰려 노력한다. 나를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국악평론가가 아닌 음악평론가라는 직함을 쓴다. 물론 국악평론가라고 쓸 때 나의 관심사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국악이 아닌 음악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고, 국악만을 다룬다 하더라도 음악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클래식이나 대중음악을 음악의 전부로 여기는 현실은 어딘가 이상했고, 무엇보다 서양음악이 아닌 음악이 음악의 보편적 입지를 갖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서 국악도 음악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렇게 대화가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화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음악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왜 중요한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나는 음악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한다. 즉, 하나의 음악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일례로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깔로 분류한다. 실제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깔로 구성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무지개의 색깔을 구분하는 언어를 일곱 가지 밖에 갖지 못 했기 때문이다. 빨강이라 지칭하더라도 빨강 안에는, 그리고 빨강과 주황 사이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이 있다. 우리는 경계에 놓인 모호한 색깔을 지칭하는 언어를 갖지 못한 탓에 특정 색깔을 포착하지 못할 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음악을 이해하는 건 무지개의 수많은 색깔을 섬세하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국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를 하나 더 갖게 되는 것이라 답하고 싶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음악의 넓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의 넓이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국악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을 이해하려는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좋은 대화는 상대의 음악적 언어를 나에게 익숙한 언어로 쉽게 치환하지 않고, 이때 발생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우리에겐 더 많은 대화와 더 많은 실패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를 오해하지만 결국엔 상대를 통해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대화 말이다.
성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