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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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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10 – 축 생일

posted Mar 0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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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 10 – 축 생일 

 

 

지났으니 부담 없이 하는 말이지만, 작년과 올해 두 번이나 정읍에서 생일을 맞았다. 

사주 명리나 별자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듯, 내 생일은 나랑 어찌나 닮았는지 일 년 중 유일하게 덜 떨어진 달에 있다. 속마음과 달리 차가운 겉모습처럼 추운 겨울이 지나가는 듯하지만 봄이 오려면 아직 먼. 백조처럼 생긴 숫자의 달이라, 차가운 호수에 떠있는 백조가 내 모습 같기도 하다. 물 밑에선 발버둥 치지만 물 위로는 고요한, 미운 오리 새끼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까지는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필요할까 싶은. 

 

일 년 중 혼자 있기 싫은 날을 꼽자면 예수님 생일과 자기 생일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 생일에는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보다는 저들끼리 즐기는 게 우선이겠고, 자기 생일에는 누군가 자신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쓸쓸하랴. 누군가가 서툰 솜씨로라도 미역국을 끓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산후조리의 주식인 미역국을 먹으며 자신을 낳느라 힘드셨을 엄마를 기억하며 제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엄마는 요리를 잘하셨다. 열 명 넘는 대식구를 위한 국을 들통에 매일 끓이셨다. 몇 가지 안 되는 반찬이지만 날마다 뭔가를 새로 해서 밥상에 올리셨다. 할머니도 요리를 매우 잘하셨다. 교회 대표 요리사셨다. 할머니는 평생 하루도 찌개나 국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하지만 마흔 살도 못 돼 돌아가신 엄마도 구십 살이 가까워 돌아가신 할머니도 내게 요리를 가르쳐주지는 않으셨다. 두 분 다 내가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소원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부도 엄마 돌아가신 후론 썩 잘하지 못했고, 좋은 직장은커녕 비정규직 축에도 못 드는 가난한 예술가가 되었다. 차라리 요리나 배울 걸,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중 운전 말고는 잘하는 게 별로 없다. 

 

나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이 시간에 일해야 하는데,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런 생각들로 인해 주방에 있으면 부아가 났다. 게다가 뭔가를 만들어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노동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 자연히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손맛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요리를 못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껏 만든 음식을 대충 담아 더 맛없어 보이게 하는 요소도 있다. 살림 도구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예쁜 그릇 같은 데 흥미가 없었다. 그건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는 할 줄은 몰라도 볼 줄은 안다. 서울에서 주로 다니던 옷가게에서도 내가 고르는 옷은 디자이너 작품이거나 수출품이었다. (물론 나는 중저가 세일상품을 사야 했었지만.) 구례에서도 공방 구석에 있는 가방을 물어보자 개업 이래 그 가방을 물어본 손님은 내가 최초라며, 이탈리아에서 사 온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보이지도 않는데 처박혀 있는 가방이 아주 예뻐 물어보자, 들어도 기억 못 하는 생소한 나라에서 온 원단이라며 그건 너무 귀해 팔지 않는다고 했었다. 장흥에 있는 옷가게에 슬쩍 들어갔을 때도, 고르는 족족 고가품이라 주인이 어떻게 그 구석에 있는 걸 고르냐고 했었다. 갤러리에 들어가 작품가를 물어봐도 거의 제일 비싼 작품을 골랐다. 그건 그냥 타고난 감각이다. 그런 내가 만약 가구나 주방용품에 관심이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소비 욕구를 어떻게 누른단 말인가. 

 

여하튼 배운 적도 관심도 없어서 요리에 젬병인 나는 재료 선택마저도 엄중하여 화학조미료는 사 본 적도 없이 친환경 유기농산물 협동조합원으로 20년 이상 살았기에 정말 맛없는 음식을 간신히 해 먹고 살아왔다. 

그런 내가 가끔, 무척 드물게 요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다. 함께 장을 보고 같이 만들어 먹고 치우는 시간은 세상 어느 유명인 인터뷰를 해서 기사를 쓸 때 보다 더 행복하다. 

 

핑계 같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맛있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 앞에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다. 혼술, 혼밥이 유행인 요즘이지만, 그래서 나도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플라스틱이나 유리 저장 용기에 담긴 반찬을 그대로 먹는 것만큼은 되도록 안 하지만, 진짜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으면 마음이 스산하여 아린다. 오죽하면 ‘먹방’하는 사람들이 생겼겠는가. 뭔가를 맛있게 먹을 때는 그 맛을 함께 느끼고 싶은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미각도 발달하지 않았고 식탐도 없는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물며 뭔가를 요리하고 싶다면 그건 엄청난 사랑이다. 

 

 

눈이 왔고 그치나 싶으면 또 왔다. 

마침내 눈이 그쳤다. 

0시에 흰 눈 위에 시작된 ‘축 생일’은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다. 

그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그날이 온다. 

같은 날 태어난 지구상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그렇듯 그날은 나를 위한 날이어야 했다. 

내가 태어난 나의 날. 

아홉 달의 태아 기간을 거쳐, 24시간이나 엄마를 진통으로 고통스럽게 하던 내가 세상으로 나온 날. 

시커먼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자라있었다는 신생아였던 나.

가난한 형편에도 3.3kg에 50cm라는 출생 시 기록이 있는 건강수첩으로 대변되는 가톨릭의대부속병원에서 외아들의 첫 아이로 태어나서,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하던 때 딸인데도 불구하고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나. 그 시절은 비록 1년 10개월로 끝났지만, 이후로도 나의 유아독존은 엄마 계신 14년 동안 지속 되었다. 지금도 고모들은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이야기하신다. 그분들은 지금도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분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정도의 자존감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언제나 하나뿐인 오빠의 첫 아이이자 최초의 조카다. 

초등학교 시절 전학을 다섯 번이나 다녀 친구라곤 없는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고모들에 둘러싸여 사랑만 받으며 살았으니, 갑자기 엄마 돌아가시고는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낯설었을까? 한 번도 바깥세상을 접해 본 적이 없다가 갑자기 허허벌판에 툭 던져진 아이처럼 늘 어리둥절했고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랑받는 게 당연하다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 자존감을 상실했다. 기준이 타인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견딜 수 없으면 스스로 차단하고 지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애 같다. 

 

생리통으로 쩔쩔매면서 진통제 안 먹고 버티는 내게 리현이 약 먹으라고 호통을 치며 컵에 물을 줄 때, “남의 컵 싫어. 내 컵으로 줘.” 했더니 “어이구, 그래? 우리 ○○, 비행기, 비행기?” 하며 내 컵을 비행기처럼 빙빙 돌려 갖다 주자, 좋다고 깔깔대며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순간 의식하며 속으론 흠칫 놀랐다. 

  ‘아~ 나는 아기가 되고 싶었구나.’ 

그런 자신이 너무 안쓰러웠다. 자기연민은 죄라고 오래전 읽은 기독교 서적에 쓰여있었지만, 나는 예전에 기도할 때도 늘 하나님 품에 아기처럼 고이 폭 안겨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런 평안을 달라고 기도했었다. 나는 그 옛날 엄마 자궁 안에 담겨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온전히 엄마와 나만 존재했던 그 완벽히 안전한 세계로. 그게 불가능해지니 엄마처럼 포근히 안아줄 사람이 절실했다. 그래서 애교라곤 없으면서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렸다. 

 

정상 성인이라면 누가 아기 취급하면 화를 내야 당연하다. 나는 기지도 않고 앉았다는데 대체 내 성장의 순서는 어디서부터 뒤죽박죽되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형편없는 나라도 생일에 미역국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생일을 여섯 시간 남기고 미역국을 끓였다. 있는 거라곤 해남에서 받은 여수산 미역에 구례에서 얻은 멸치액젓뿐이라 멀겋고 투명한 미역국을 끓였다. 며칠 만에 밥이라고 1인용 압력밥솥에 했는데 전기밥통이 없으니 곧 식어버렸다. 특별 요리로 뱅쇼를 끓였다. 손수 사 온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맞은 편에서 노래를 불러 주었느냐고? 그건 비밀이다. 정말 소중한 건 꼭꼭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다만 그날, 아주 오랜 인연으로부터 끊어짐을 선물처럼 받았고, 대신 가장 필요하고 갖고 싶었던 생일 선물을 받았다.

 

생일 다음 날, 칠십 대인 큰고모가 전화하셨다. 생일에 혼자 있으니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돈을 부치셨다고. 용돈 드려야 할 나이에 아직도 돈을 받다니 면구스러웠다. 한데 그 돈으로 누구와 어디에 가서 무얼 사 먹을까? 누가 정읍까지 나와 밥 먹으러 와 줄까? 

 

생일 케이크를 일주일 넘게 먹었다. 미니 마일드 로스트 아메리카노에 무항생제-Non GMO우유를 타서 곁들여 마신다. 이제는 유통기한 지나도 상하지 않았으면 먹는다. 예전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그렇다고 아기가 아이가 된 걸까? 아이는 또 언제 어른이 될까? 죽기 전에 철이라도 들까? 철들면 죽는다잖아. 죽는 게 두렵진 않지만, 막상 당하면 그렇지도 않겠지. 

 

 

“내년 일 년만 더 살고 죽고 싶어.” 

“작년엔 올봄까지만 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일 년 더 늘었네요?” 

“죽는 게 무서워.” 

구십일 세 어르신과 나의 대화다. 

정읍에 와서 처음으로 연락한, 지난봄 요양 보호 대상자 어르신은 나를 기억하시고 반가워하셨다. 

요양보호사가 오지 않는 휴일에 곶감을 챙겨 들고 방문했다. 어르신은 여전히 고우셨지만, 내가 일할 때와는 달리 어질러진 집안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금 오는 요양보호사는 하루에 네 집이나 다닌다고 한다. 그러니 어르신 한 분 모셨던 나와는 다를 것이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고 수저를 삶고 쓰레기를 버리고 재활용품 분리를 하고 이부자리를 햇볕에 털어 말리고 청소를 하고 밥을 차려서 함께 식사했다.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나는 내 수저를 사용했다. 반찬도 어르신 수저에 별도의 젓가락으로 놓아드리고 나는 거의 먹지 않았다. 국에 만 밥만 후다닥 먹었다. 식사 후에는 가져간 커피믹스를 내 컵에 타서 마셨다. 반년 만에 간 나는 여전히 요양보호사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보호 대상 1순위였으므로. 

 

내가 다리를 주물러 드리자, 어르신은 또다시 근처에 빈집을 알아보라고 하셨다. 잠시 잠깐 근처에 집을 알아봐서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릴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곧 아님을 알았다. 그곳은 내가 머물고 싶은 지형이 아니었다. 내게는 산책할 곳이 필요하다. 배산임수(背山臨水)까지는 아니라도 산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동네는 허허벌판이었다. 의지할 어르신이 계심은 좋지만, 아쉽다. 

 

원주 할머니나 정읍 할머니 정도만 나를 좋아하셔도 곁에서 의지하고 돌봐드리며 살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관계는 의무가 되는 순간 벗어나고 싶어진다.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아낌없이 잘해줄 수 있다. 타인이나 상황에 의해 책임져야 하는 순간 관계는 올무가 된다. 만약 언제든 떠날 수 있는데도 계속 머물게 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 자리일 것이다. 

그 가까운 이웃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으면 좋겠다. 따뜻하고 인정 많은 할머니도 좋고, 믿음직스럽고 일 잘하는데 대화도 잘 되는 남자친구도 좋고, 건실하고 이해심 많고 말수 적은 여자친구도 좋다. 서로 떠날 걱정 하지 않고 옆집에서 든든히 지켜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김치부침개나 떡볶이나 국수를 하는 날이면 친구를 부르거나 가져가서 함께 먹을 것이다. 특별한 날에는 삼겹살이나 채끝살 정도 구워 먹을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일에는 소고기나 홍합을 넣고 미역국도 끓여줄 것이다. 물론 내 생일엔 그 친구가 끓여줄 것이다. 내년 생일엔 누가 내 미역국을 끓여줄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일이 한참 지나 정읍을 떠나기 며칠 전, 생일선물이 배달됐다. 

만영재 앞 저수지 물빛 같은 포레스트 그린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훗날 작업실을 구하면 마련하고픈 물건이었는데, 친우가 미국에서 세 군데나 매장을 뒤져도 못 구한 걸 한국에 돌아와 인터넷 직구로 사서 보내주었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씻고 유기농 우유에 뜨거운 물을 타서 인터넷이 되는 본채로 갔다. 스피커와 휴대전화기를 연결하고 첫 곡을 틀었다. 스물한 살이던 내가 가사를 쓰고 친우가 노래했던 그 곡이 흘러나왔다. 

그날 새벽 믿기지 않는 비보를 접한 내 눈물 거두어 빛살가루 채우시는 그분이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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