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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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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하얀집 정원일기 - 안녕

posted May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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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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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하얀집 정원일기 - 안녕  

 

 

[모리의 정원]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전남편이 싫지 않지만 이혼한 여자와 남자가 30년 동안 정원 있는 집에서 나오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남자는 온종일 정원만 쳐다본다. 정확히 말하면 정원의 풀과 꽃뿐만 아니라 개미도 관찰한다. 땅을 깊이 파고 연못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다. 그 남자는 저명한 화가이며 문패를 만들어 놓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훔쳐 가는 명필가이다. 

그렇게 엉뚱하고 유명해서가 아니었다.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가 여자가 해 준 카레 우동을 집어먹지 못하고 주루룩 주루룩 국물 튀기며 흘리는 장면에서, 나는 그런 남자에게 국수를 만들어 주고 함께 먹고 싶었다. 훈장을 줘도 사람들이 찾아올까 봐 마다하는 그런 멋진 남자와 그 남자가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방편인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여자가 되어서 살고 싶었다. 그게 내 ‘정원’ 꿈의 시작이었다. 

 

그해 김종철 선생님이 작고하셨다. 나는 정원을 가꾸며 선생님이 소원하시던 농사도 텃밭에 지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정원을 찾아다닌 지 2년. 겁이 많은 나는 의지할 할머니나 남자친구가 필요했다. 

 

‘무슨 뜻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거침없이 걸어가던 제 발걸음을 왜 멈추게 하셨는지, 그리고 왜 여기에 머물게 하셨는지 지금은 모릅니다. 어쩐지 지난 2년간 가열차게 해 온 나만의 순례가 이곳을 나서면서 잠시 멈추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몇 년간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줄창 떠돌았겠죠.

걷는 날을 빼곤 하루도 글을 쓰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그것조차 못했습니다.

이상한 나날이었습니다.

……

(늑대와) 빨간 모자처럼 지낸 일주일과 사흘이었습니다.

2022년의 4월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고 갑니다.

지금의 이 돌연한 일이 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합니다.

……

아마 아주 오래 기억하며 두고두고 곱씹을 듯합니다.

이제 저는 앞일을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갑니다.’ 

 

제주에서 나오기 직전에 남긴 글이다. 

 

진도 관지의 하얀집으로 왔다. 

남향은 아니었지만 살 수 없는 북향도 아니고 살기 힘든 서향도 아닌 동향집이었다. 서쪽으로도 창이 많아 집이 밝았다. 창가 책상 앞에 펼쳐진 정원 너머로 초록 논과 그 뒤에 송전탑 하나 없이 너른 앞산과 완만한 뒷산.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지만 외딴 집도 아니고, 무엇보다 관지가 사셨던 곳이니 안심이 되었다. 

차 안의 짐을 풀지 않았다. 휴대전화기 연락처를 모두 삭제하고 전원을 껐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글을 쓰며 최소한으로 먹었다. 다행히 내게는 쌀과 김치가 있었다. 관지가 하죽도에서 주신 자연산 돌김도 있었다. 관지가 집에 있는 것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셔서 냉동 얼갈이배추로 된장국도 끓여 먹었다. 가끔 뒤꼍 텃밭에 자라난 머위를 뜯어서 찌거나 데쳐 먹었다. 평소 먹는 데 연연하지 않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성경을 다 읽고도 기도가 되지 않던 어느 날, 책을 한 권 펼쳐 들었다. 

[메르헨, 자아를 찾아가는 빛](미야타 미쓰오 지음, 양현혜 편역, 사계절)이었다.

 

‘빨간 모자는 특히 할머니에게 사랑받고 있었습니다. 인적이 끊긴 숲속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라는 것은 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매우 친절하고 현명하며 도움을 주거나 충고를 해 주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모성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즉, 어린이들 마음속의 이상적인 어머니 모습은 이와 같은 ‘숲속의 할머니’ 모습입니다. 자기를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어떠한 짓을 해도 용서해주는 ‘그레이트 마더’로서, 현실의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동떨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뭐든지 해 주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끌어안아 집어삼켜 버리는 마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빨간 모자가 찾아갔을 때 숲속 할머니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은 늑대였습니다. 여기서 늑대는 이미 지적한 대로 ‘그레이트 마더’의 또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늑대에게 잡아먹힌 후의 어둠의 세계는 이를테면 태어나기 전의 모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러고 나서 빨간 모자가 늑대의 뱃속에서 나오는데 이는 빨간 모자의 ‘죽음과 재생’을 상징합니다. 즉, 빨간 모자는 지금까지 어머니와 유지하던 공서 관계를 어찌 됐든 한 번은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한 사람으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늑대의 뱃속에서 뛰쳐나온 빨간 모자의 “아아, 무서웠어요. 늑대 뱃속은 정말 깜깜했어요”라는 외침에는 새로 태어난 자의 기쁨이 배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늑대의 뱃속에서 나온 빨간 모자가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빨간 모자는 서둘러 커다란 돌 몇 개를 가져와 늑대의 뱃속에 채워 넣습니다. 눈을 뜬 늑대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뱃속의 돌 무게 때문에 쓰러져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빨간 모자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혀 주저앉지 않고 자립적으로 맞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간 전국의 할머니에게 관심을 보였던 내 심리가 파악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자기를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어떠한 짓을 해도 용서해주는 ‘그레이트 마더’로서, 현실의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동떨어진 존재’를 찾아 헤맸던 것이었다. 

 

칩거 일주일 만에 우수영 성당에서 기적처럼 기도 응답을 받았다. 

 

다음 날, 큰고모가 걱정하실까 봐 외우고 있던 번호로 전화했다. 우리 할머니처럼 새벽기도 하시는 큰고모는 내게 기도 제목을 물어보셨다.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글. 

 

“너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듣고 보니 그랬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아주 잘 산 셈이다.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 한 번 못해보고 야학 교사 한 번 못 해 보고 대학 생활을 했다. 이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보았다. 청담동에서 영국 유학파 헤어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기고 부암동 의상실 옷을 입던 나는 일주일 내내 등산복 한 벌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차 한 대 달랑 몰고 집을 나왔다. 비움 실천한다고 소유물을 차 한 대로 축소 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돈 없이도 여기저기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걷고 쉬지 않고 글을 썼다.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았으면 잘 산 것 아닌가. 

이제 나는 소외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빽 있는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국가와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짓는 틀 밖의 사람들이 어떤 시선을 받는지 경험해 보았다. 

 

2년 가까이 정원을 찾아 헤맸다. 지나고 보니 나는 [모리의 정원]의 여자주인공이 되고 싶었으나 남자주인공의 삶이 맞았다. 가만히 사물이나 사람을 관찰하고 작품으로 만드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나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은 기도제목은 현재로선 단념, 훗날을 위해선 보류. 

 

집주인에게 고마워서 쓴 <꼬마 정읍댁의 정원일기>를 시작으로 곡성, 해남, 남원 거쳐 지금까지 스무 편의 정원일기를 탄생시켰다.

나같이 섬세하고 진심 어린 정원사가 맡아주겠다고 하면 전국의 빈집 주인들이 줄을 설 줄 알았다. 정원관리사나 가사도우미에게는 시간당 비용을 지출하면서, 어차피 비어있는 집에 자발적으로 청소와 관리와 손질을 해 주고 집주인도 모르는 그 집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작품으로 써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1가구 2주택 소유 부자들 눈이 거기까지 뜨이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이제 조금 오래 머물 정원이 필요하다. 물론 소유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아직도 없다. 남의 것이니까 알뜰살뜰 가꿨지 내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애착이 갈지 잘 모르겠다. 집주인이 좋아할 모습을 기대하며 잘했던, 떠날 것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는, 그게 내 방식의 정원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진도 하얀집에서 성경 읽기와 기도와 집필 외 공사도 했다. 마침 집 뒤 배관 덮개 시멘트 공사가 거주일과 겹쳐서 공사를 지켜보고, 주방 수도꼭지와 형광등을 교체했다. 관지가 내집처럼 쓰라고 하셨으니 내집처럼 고쳤다. 마당과 돌담과 계단과 텃밭 벌초도 대충 했다.

 

12일, 인생의 암흑기를 이곳에서 딛고 나아간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끄기 전, 두려워하는 내게 관지가 그랬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쉽게 나올 수도 없는 하죽도에서 말이다. 성령처럼. 마음으로. 기도로. 

엄마 아빠 기일을 이곳에서 보냈다. 엄마와 아빠도 나와 함께 계셨다. 기억했으니까.

혼자 있다고 해서 혼자가 아니었다. 긴급 기도 부탁했던 분들 모두 나와 함께 계셨다. 나의 주님도. 

나는 이제 할머니나 남자친구가 있는 정원을 구하지 않겠다. 정원 하나 구하기도 힘든데 옵션이 너무 많았다. (사실 내가 원한 건 거창한 정원이 아니었다. 꽃과 채소 조금 심을 흙이면 충분했다.) 대신 기도하고 싶을 때 가서 기도할 수 있는 작은 성전 가까이에 집이 있으면 좋겠다. 눈치 보지 않고 아무 때나 가서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사는 집 옆에 내 정원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또한 주어지지 않는다면 진도 하얀집처럼 기도실이 방이라도 그걸로 족하리라. 

 

그동안 <일곱째별의 정원일기>를 좋아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한다. 특별히 만년필과 공책을 사서 필사한 은정은 최고의 독자였다. 언젠가 이 글들이 소담한 정원처럼 예쁜 책으로 묶여 나올 날, 여러분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고 싶다. 

안녕, 여러분.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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