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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로로, 이 영화를 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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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인가 예술인가 -<화양연화>

posted Jul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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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mp4_003311466.jpg

 

1.

가장 권위 있는 영화 목록 리스트인 영국영화협회(BFI)의 <Sight & Sound>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 24위.

Time Out Magazine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8위.

BBC 선정 역대 최고의 비영어권 영화 9위.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2위.

<Guardian>지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5위.

 

2.

이처럼 화려한 평가를 받은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는 줄거리만 보자면 아주 단순한 멜로물에 불과하다. 영화의 도입부에 경극의 대사로 소개되는 다음의 시구가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갈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 후 떠난다.”

 

3.

처음 이 영화를 접하면 약간의 어리둥절함을 피할 수가 없다. 탄탄한 구성과 미묘한 분위기가 깊은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뭐가 그리 대단한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처럼 5번 이상 이 영화를 보고 또 보면 이 영화의 숨겨진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마침내 남녀 간의 사랑을 이처럼 깊이 있게 다룬 영화가 또 있을까 싶어 진다.

 

4.

<화영연화>를 한 번만 보고 이 영화에 담긴 모든 것을 파악한다면 아마도 그는 천재적인 영화적, 미적 감각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 플롯의 전개가 꼬여있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으며, 내용상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지나치기 쉬운 소품이나 하나의 컷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왕가위 감독이 관객들과 트릭 게임을 벌이고자 해서, 또는 일부러 영화를 어렵게 만들고자 한 것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잘 놓여있도록 구성된 것이다.

 

화양연화_edited.jpg

 

 

5.

음악의 경우 그 오랜 역사를 통해 세상에 탄생할만한 멜로디는 이미 다 나온 것처럼 보여도 놀랍게도 누군가는 또 다른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내곤 한다. 영화의 경우도 감독이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이미 다 세상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왕가위 감독의 이 영화를 보면 영화를 통해 또 얼마나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주 약간만 사용하는 슬로모션, 카메라의 좌우 패닝과 수평 돌리(dolly)의 교묘한 조합, 놀라운 색상의 조화, 오줌을 지리게 할 정도로 절묘한 음악의 사용 등등.

 

6.

이 영화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우선 마지막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장면을 제외하면 확트인 야외 장면이 없다. 그러니 하늘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 흔한 나무도 한 그루 등장하지 않는다(싱가포르라는 공간을 시사하기 위한 짧은 스틸 컷을 제외하면). 아주 비좁은 실내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며, 야외 장면은 모두 밤의 좁은 골목길이다. 셋방살이하는 집, 주인공들의 일터, 집 앞의 층계와 골목, 그리고 모텔과 레스토랑이 공간의 전부이다. 대부분의 공간은 두 사람이 마주치면 어깨를 틀어야 할 정도로 협소하다.

 

내용상 중요한 인물인 소려진(장만옥)과 주모운(양조위)의 배우자들 얼굴은 단 한 번도 화면에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뒷모습과 음성만이 나올 뿐이다. 이들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지만 무엇보다 관객이 쉽사리 손가락질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이들도 주인공들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라난 사랑의 감정에 휩쓸린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육체적 정념에 사로잡힌 관계가 아님은 살짝 스쳐 지나가는 두 컷으로 묘사된다.

 

어떻게 보면 매우 질척한 애정 영화이지만 단 한 번의 키스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살짝 훔쳐내는 입맞춤조차 없다. 단지 손과 미소와 눈물, 그리고 담배 연기로 이들의 사랑이 묘사된다. 뒤늦게 모텔로 찾아온 장만옥의 뺨에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조용히 흐르고, 아스라이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는 글로 표현하면 신파조이지만 영상으로 표현된 것은 예술이다.

 

7.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잔뜩 긴장하고 등장인물의 표정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 가방, 반지 등에까지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컷에도 그 의미를 물어봐야 한다. 담배에 묻은 루주 자국, 여러 차례 등장하는 슬리퍼 한 짝은 특히 중요하며, 장만옥이 입고 있는 옷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숨 가쁘게 따라가야 한다. 마지막 부분에 싱가포르에 불쑥 찾아온 장만옥의 배가 약간 부풀어 있는지에 대한 판단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에 대한 생각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화양연화.mp4_004915166.jpg

 

화양연화.mp4_005045066.jpg

 

 

8.

1969년 생을 마감한 독일의 철학자, 미학자, 사회학자인 아도르노는 영화가 인간의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빼앗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모든 예술이 추구해온 ‘현실의 재현’이 완벽하게 구현된 영화는 현실을 예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해나가는 상상력의 공간을 남겨놓지 않는다. 하지만 왕가위의 <화양연화>는 테렌스 맬릭(Terrence Malick)의 영화들(<트리 오브 라이프>, <씬 레드 라인>, <황무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들(<안드레이 루블료프>, <잠입자>, <솔라리스>, <노스탤지아>, <희생>, <거울>), 벨라 타르(Béla Tarr)의 영화들(<사탄탱고>,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토리노의 말>)과 더불어 영화가 인간의 상상력을 얼마나 풍성하게 자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9.

이 영화의 야외 장면이 거의 밤인 이유는 두 주인공이 모두 일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애정 영화의 주인공들이 마치 한량처럼 다루어지는 것에 비해 이 영화는 또 다른 홍콩의 애정 영화 수작인 진가신 감독의 <첨밀밀>(1996)처럼 끊임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두 주인공의 애정이 깊어지는 과정을 담은 무협소설을 호텔에서 함께 쓰는 장면도 밤늦게 짬을 내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

이 영화의 가장 맛깔난 장면은 ‘연기하기’ 장면이다.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연기하기’ 장면은 자칫 관객에게 혼선을 주기도 하지만, 알고 나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게 되면서 동시에 잔잔하고 아련한 아픔이 스며든다. 장만옥이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추궁하는 예행연습, 자신들의 배우자들이 어떻게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궁금해하며 두 주인공이 연기해 보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만옥과 양조위가 이별을 예행연습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은 양조위의 거듭된 부탁으로 무협소설을 함께 쓰기로 한 장만옥이 마치 어린 소녀가 늦은 밤 밀린 숙제하는 모습으로 어쭙잖게 글을 쓰는 장면이다.

 

화양연화.mp4_002594966.jpg

 

11.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별이 서로 빛을 통해 상대의 존재를 느낄 뿐 다가가지 못하듯이, 또는 별의 주위를 도는 행성이 각각 자기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듯이, 사랑은 분명 실재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양연화>

영화의 완성도, 영화적 표현의 적합성

____●●●●●●●●●

 

예술적 기여 또는 역사적 중요성

____●●●●●●●●○

 

감상 또는 이해의 용이성(흔히 말하는 '대중성'과는 다름)

____●●●●●●○○○

 

생각의 힘 또는 지적인 능력을 키워주는 정도

____●●●●●●○○○

 

감성이나 상상력을 자극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요소

____●●●●●●●●●

 

사상적 진보성(인류의 보편적 정의와 가치에 대한 태도)

____●●●●●○○○○

 

 

(아래 영상을 볼 때 자막을 '한국어'로 설정하면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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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길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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