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터 기생의 레퍼토리까지 포괄하는 조선의 음악문화유산, 무형문화재 또는 민족주의자들의 액세서리, 교과서에 실린 음악, 트로트, 씨름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사람 능력에 비하여 좋은 대학을 보내주는 마력의 도구, 저작권이 없어서 마구 방송되어도 되는데 인기는 없음”
지난 5월에 우리는 위와 같은 ‘국악’의 어려움을 보았다.
“국악은 애호가나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미숙함이나 형편없음이 그대로 공연으로 올라가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극소수다. 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국악 공연이 노잼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국악은 암묵적으로 보호받고 있고 그저 공연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무대 위의 책임감 그리고 결과물의 수준이 날로 추락하고 있다. 마술공연에서 눈속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마술사는 바로 퇴출될 것이다. 그것은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데, 국악은 그렇게 지켜보는 눈이 없다. 눈을 가진 자들도 국악을 알아볼 수 없거나 국악 앞에서는 눈을 감는다. 이쯤 되면 “어려운 국악”에서 가장 어려움에 처한 것은 국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국악은 ‘어려움 도려내기’의 일환으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었다.”
이번 지면에서 또 다른 국악의 쓰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렇게까지 국악이 뭔지 알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세상 이치가 이곳에서만 특별하게 이상스럽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으며, 무언가 배울 점을 찾아본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존재가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 (이 글은 5월 국악의 쓰임 2. 어려운 국악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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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쉬운 국악
보통은 사는 것(生)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살아만 있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살아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떻게든 쉽게 살고 싶지만, 쉬운 삶이 무엇인지 아는 척만 하며 스스로 어려운 삶을 택한다. 그리고 매일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하며 어렵게 살아간다.
국악의 쓰임 세 번째. ‘쉬운 삶’을 위해 선택된 국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고등교육과정에는 예체능 계열이 있었고 수능 영역도 달랐다. 지금도 음악ㆍ미술ㆍ체육은 입시전쟁에서 가장 쓸모없는 과목이지만, 그런 과목을 잘하고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당 과목과 관련된 미래를 꿈꾼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20세기. 분위기가 그랬다. 예체능계열이란 운 좋게(또는 나쁘게) 어린 시절 재능을 발견해줄 소위 전문가가 가까이에 있으면 그곳에 발을 들이게 되지만, 웬만한 초능력을 가지지 않는 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또는 끈기가 부족해서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즉, 특별한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성역(聖域)이었다.
그 성역 안에는 계급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우리가 이름을 아는 극소수의 스타들이 존재한다. 그 아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초능력이 아니라 평범한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바깥으로 밀려난다. 남은 이들은 중간에 아주 촘촘한 계급 안에 속한다. 밀려나지 않았거나 차선책이 없는 이들은 그저 그러한 자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번 생에 주어진 자신의 몫을 열심히 해나간다. 자신의 계급을 인정하지 못해 성역 변두리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가장 하위계급에 넣어준다.
이러한 계급이 뚜렷하게 보일수록 건강한 계열의 성역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상적인 계열일수록, 성역 안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세계를 무대로 싸움을 해야 하는 계열에서 벌어지는 경이로운 일은 말로 다 표현이 어렵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국악도, 비교적 좁지만 나름의 성역을 가지고 있다. 처음 구성원들은 그 성역도 ‘작지만 뚜렷한 색’을 가진 곳이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좁은 것 같았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어 주목받고 그로 인해 성역이 넓어지기를 기대했다. 건강한 성역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 안달이 나 스스로 몰려드는 이들이 넘쳐나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국가의 필요에 쓰임 받기 위함, 기존 구성원들의 좀 더 많은 아랫것을 거느려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 등의 이유로 성역을 넓히는 일에만 주력하다 보니 부작용도 생기기 시작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기른 나의 아바타가 현실의 나처럼 넓은 성역에서 큰 고생을 하며 뚜렷한 계급사회의 어느 까마득한 ‘아랫것’에 속하기보다는, 좀 좁더라도 그 안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인생 즐기며 편히 보냈으면 하는 이에게 ‘넓음’만을 지향하는 국악이라는 성역은 블루오션이었다. 성역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별로 중요치 않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조금만 땀 흘리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그곳’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아바타들이 모이면서 성역은 조금씩 넓어지기는 하지만, 그 성역의 가장 높은 지점은 밑바닥과 별 차이가 없다.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계급은 뚜렷하지 않으며 굳이 경쟁하지 않는다. 급기야 성역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아무거나 해도 성역 안으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기도 하며, 자신들이 원한다면 성역 밖에 잘 살고 있는 이들을 억지로 성역에 끌어들이려 하기까지 한다. 결국은 해당 성역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고 가치를 잃고, ‘성역이고 싶은’ 우스운 꼴이 된다.
쉬운 것은 우스운 것과 동일시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우스움. 이때의 우스움은 재미가 아닌, 하잘것없음을 뜻한다. 국악의 쓰임 ‘쉬운’ 국악은 ‘우스운’ 국악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테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그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며, 눈치채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통해 스스로를 그러한 상황에 놓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더 심각한 경우는 그런 상황에 있음을 알지만 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두려워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택한 ‘쉬움’이 모여 ‘우스운’ 성역이 되었다. 우스운 성역을 서성이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외딴곳에서 처음부터 나의 성역을 만들기 시작하는 용기. 하잘것없음을 피할 단 하나의 방법.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쉬운가.
(다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