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회색 무명 치마저고리는 낡았지만 깨끗했고 그 위엔 짙은 남색 앞치마를 둘렀다. 비록 남루한 입성이지만 언제나 정갈했으며, 표정은 증명사진 속의 어색한 듯 굳은 모습같이 늘 한결같았다. 그녀가 분주한 것은 대개 아침나절이었다. 그날 장사할 술국을 끓이기 위해 몇 가지 푸성귀와 토란 같은 뿌리채소를 다듬고, 말라비틀어진 북어를 방망이로 힘껏 두드려 쫙쫙 찢거나, 땅에 묻힌 술독을 비롯한 몇 개의 항아리를 닦아 윤을 내는 시간이 그쯤이었기 때문이다. 술국을 안치고 끓이는 동안, 잠시 주점 앞의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임진왜란을 겪었다는 팽나무가 있는 마을 어귀를 내다보는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한 ‘평온’의 시간이었다. 그 잠시의 평온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같이 흐르고 나면,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아드를! 어서 이으러나세요. 하끄교 가야지”
그녀의 발음이 어딘가 이상하다. 어색한 발음은 그녀에겐 낙인이다. 그래서 하루 중 입을 열어 몇 마디 말을 하는 때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실랑이를 하는 그 시간이 거의 전부였다.
“아이씨, 핵교 가기 싫어!”
아들은 진저리를 치며 이불을 뒤집어쓰며 소리를 지른다. 여자는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마음속으로 수를 세는 듯하다.
“무슴 말이야? 어서 이으러나세요. 밥 먹고 하끄교 가야 해!”
그녀의 말은 나긋나긋하지만 단호하다. 국민학교 5학년생인 아들도 그걸 잘 안다. 결국 일어나 진상을 거둔다.
“오늘은 제발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내가 싸우고 싶어 싸우남? 자꾸 놀리니께 그러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들이 놀림을 받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여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의 급작스런 항복선언은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을 공황에 빠뜨렸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조선 땅으로 건너온 하층 서민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돌아갈 방도를 잃은 일부는 난민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부모가 그랬다. 일본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엄두가 나질 않았던 여자의 부모는 조선에 남기로 했으나, 자신이 일하던 포목점이 조선인들에게 약탈을 당하자 마음을 바꿨다. 어떻게든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부산을 향해 가던 부모를 놓친 것은 천안에서였다고 했다. 당시 나이 12살이었던 여자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역 주변을 떠돌다, 그 행색을 이상하게 여긴 중국인 노인에게 거둬졌다. 가난했지만 비교적 안정되었던 어린 시절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중국인 노인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살았지만, 노인이 죽자 여자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다고 했다. 봉명동 중국인 노인의 집을 가로챈 조선인 남자는 스스로 중국인 노인의 양아들을 자처했지만 아무래도 의심쩍었다. ‘니 하오’ 중국어 인사를 건네며 점령군이 진주하듯 들이닥친 조선인 남자는, 여자가 조선말을 잘 하지 못하는 일본인이란 걸 알고는 잠시 의아해하는 듯했다. 그는 곧 조선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조선어는 권력이 되었다.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 행사하는 권력은 폭력이기 십상이다. 여자는 폭력에 노출된 것이었다. 남자로부터의 폭력은 여자의 육체를 향한다. 가장 치졸한 폭력이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폭력이다. 폭력의 덫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빼낸 것은 1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러나 곧 전쟁이 시작되었고 세상은 또다시 뒤집혔다. 전쟁 당사자들이야 피아가 있고 생사를 건 사투가 있겠으나, 전쟁의 외부에서 다중의 고통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민간인이며 그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노인이다. 여자는 피난민들 틈에 섞여 방향타 없는 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떠돌았다. 아주 가끔 잔잔한 수면 위의 배처럼 평온한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센 풍랑에 부서질 듯 요동치는 삶이었다.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여자는 이때의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여자는 자신이 너덜너덜해졌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파국의 시간을 난파선마냥 떠돌 때도 존재의 ‘이유’따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숨통이 터지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존재가 보이자 엄청난 무게의 절망이 거대한 바위처럼 여자를 짓눌렀다. 다시 숨이 콱 막혔다. 어떤 상황을 말로 옮길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고 뚜렷하게 인식되자 문득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삶을 죽음의 방향으로 급선회를 하게 했다.
“넌 말 하지 마! 내가 너를 읽을 게.”
그때 지금의 남편이 다가왔다. 한 사람이 다가오자 여자의 세상이 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결혼이랄 것도 없이 같이 살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다른 것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삶의 조건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고 수많은 고난이 폭풍우가 몰아치듯 두 사람을 내몰았었지만 그 시절의 기억에서는 늘 단내가 폴폴 났다. 그러고 보면 단 하루의 아름다운 기억이 평생을 견디게 한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하다.
여자의 남편은 착한 사람이었다. 여자에게는 더없이 편하고 따뜻한 둥지였다. 일본인이라는 것도, 제한된 의사표현 정도만 하는 한국어도, 험한 세월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착하다는 것은 미덕이 되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은 서서히 변해갔다. 좌절의 눈빛과 절망의 언어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여자를 찔렀다. 다행인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남편은 단 한 번도 여자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한국어가 어눌하다는 것을 탓하거나 농담 삼아서라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남편을 신뢰했다. 남자는 일을 찾아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공사판을 따라 떠도는 혹은 그것을 찾아 떠나는 노가다 잡부가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낡은 가방에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하면 여자는 무서웠다. 혼자 남아 시간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간조 탈 때면 꼭 집에 올 거야.’ 남편은 여자를 달랬다. 처음에는 그랬다. 보름 간격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꼬박꼬박 여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여자는 돈보다도 남편의 냄새가 좋았다. 다시 공사판으로 떠나는 날엔 남편의 체취를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에 담을 듯 코를 흠흠 거리며 들이마셨다. 남편이 집에 오는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도 했고, 다른 현장으로 옮겨가느라 그랬다고도 했다. 오래지 않아 남편은 술꾼이 되어갔고 주사도 심해졌다. 서너 달 만에 들러서는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여자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변해갔다. 여자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 생각했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일본여자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루코!”
거의 여섯 달 만에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남편이 그녀의 일본이름을 불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남편은 험한 현장을 견디느라 닳고 닳아빠진 배낭 속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려 비닐에 여러 겹으로 싸인 돈뭉치를 꺼내놓았다.
“청자?子야! 우리 이 돈 갖고 시골에 가서 살자.”
그렇게 해서 들어와 살게 된 게 지금의 마을이었다. 남편은 한적한 시골에서는 여자가 마음 졸이며 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였다는 게 드러났지만 말이다. 마을 어귀의 허름한 주점을 인수했다. 면소재지의 도가에서 소개를 받아 비어있다시피 한 것을 넘겨받은 것이었다. 처음엔 부부가 함께 꾸려갔다. 음식 솜씨가 좋은 여자는 김치를 담그고 술국을 끓였다. 남자는 주문을 받고 술상을 나르고 손님들의 말 상대가 되었다. 낯가림이 심했던 남편이 스스럼없이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여자에게 남편은 ‘노가다 판에서 굴러먹었더니 저절로 여우가 되었지’라며 멋쩍어했다. 그러다 가게가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남편은 다시 공사판을 찾아 떠났다.
시골마을의 보수성과 배타성, 단적으로 말하자면 ‘텃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그 마을의 아낙들에게 ‘키 크고 얼굴 허연 젊은 여성’의 등장은 야릇한 정서적 균열을 가져왔다. 주점이야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술시중을 드는 여성은 언제나 ‘볼품없는 노파’였고 마을의 아낙들이 긴장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키 크고 얼굴 허연 젊은 지집(계집의 방언)’이 나타난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말도 서툰 ‘왜년’이라지 않은가. 마을의 아낙들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여자를 지칭할 때는 늘 ‘왜년’이었고, 동네 남정네들을 홀려 막걸리를 팔아먹는 ‘여수(여우의 방언)’였다. 동네 아낙들은 아이들에게 ‘튀기’(혼혈의 비속어로 여자의 아들을 가리킴)와 놀지 말라고 윽박질렀고 사내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내들은 예펜네(여편네)들의 말을 흘려들을 만큼 주점의 새로운 분위기를 좋아했다. 그 분위기라는 건 순전히 여자에게서 나오는 묘한 낯섦과 그것으로 인한 설렘이었다. 사내들의 그런 낌새는 아낙들을 더욱 강경하게 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왜년이 동네 사내들을 후리고 지랄이냐? 이년아, 이 여수 같은 년!”
사단이 벌어진 건 동네 아낙 하나가 부부싸움을 벌인 후, 그 분을 삭이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다른 아낙들을 대동하고 여자의 주점으로 들이닥친 후였다. 남편에게 얻어터져 눈두덩이 시퍼렇게 된 아낙이 여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들었고, 다른 아낙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뜯었다. 여자는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하면서도 신음소리 한 번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그런 여자의 태도에 아낙들은 더 약이 올랐다.
“이 씨발, 다 죽일 껴. 다 죽여 버릴 껴!”
학교에서 돌아온 여자의 아들이 그 광경을 목도하곤 지게작대기를 휘두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곤경에 내몰린 늑대의 단말마적 비명과 번개가 치는 듯한 안광에 놀란 아낙들이 순간 공포를 느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엄마는 왜 그려, 왜 그러고 당하고만 있냐구! 부엌칼이라두 들구 나와 휘둘러야지!”
여자는 절규하는 아들을 꼬옥 끌어안았다. 가슴은 터질 듯 아팠고, 눈물은 비로소 강물이 되어 흘렀지만 신음소리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게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어야.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녀야. 그리고 내게는 아드르 니가 있으니까 괜찮아!”
모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쪽빛 하늘이 눈이 시리게 내려앉고 있었다.
얼마 후, 여자의 남편이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주점은 빈집이 되었다. 마을의 사내들은 갑자기 허전해졌고, 일본에서 여자의 부모가 오랫동안 그녀를 찾았으며 일본으로 초청해 데려갔다는 풍문만 빈 주점을 싸고돌았다. 그녀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왔으리라 믿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말이다.
지금 이 나라에는 수많은 ‘왜년’들이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녀들은 일본인은 아니지만, ‘왜년’이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배제는 여전히 그녀들의 몫이 되고 있다. 천박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결혼문화와 가당치도 않은 순혈주의에 뿌리를 둔 인종주의가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