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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순수한 형태의 즐거움 - <사랑은 비를 타고>

posted Jan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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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술을 접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는 얻기 힘든 감성적인 고양이나, 이성적인 자극, 또는 어떤 영적인 숭고를 경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술을 접하면서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놀라움을 경험하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황홀함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편 역설적으로 예술을 통해 낯섦 혹은 괴로움이나 불쾌감과 마주하기도 한다(미술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루치안 프로이트, 영화에서 라스 폰 트리에나 미카엘 하네케).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감정으로 치자면 그것은 아마도 ‘즐거움’ 또는 ‘흥겨움’일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대중문화나 과거의 민중문화에서부터 비교적 소수만이 즐기는 고급예술에까지 여지없이 적용될 수 있는 예술이 주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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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치안 프로이트의 회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히든>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안티크라이스트>의 한 장면

 

1백 년이 넘는 영화의 역사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즐거움’을 안겨준 영화가 무엇일까? BFI(영국영화협회)는 10년마다 한 번씩 세계 유수의 전문적인 영화 관계자들의 투표로 가장 위대한 영화 100편의 목록을 랭킹으로 발표하는데, 지난해 말에 발표된 목록을 쭉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영화가 심각하거나 난해하거나 사색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만 들어서 입가에 미소를 감돌게 하는 영화가 오뚝하니 10위에 올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 1952, 스탠리 도넌 공동 감독)이다.

 

이 목록의 상위권에 미국 영화감독이 많이 있지만(히치콕, 오손 웰즈, 스탠리 큐브릭, 데이빗 린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등) 이들 대부분은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했어도 일종의 국외자이거나 외톨이인 경우가 많았으며 넓은 의미의 독립영화에 포함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철저히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작업을 한 거의 유일한 상위권 작품이 바로 이 <사랑은 비를 타고>이다. 또한 할리우드가 쏟아낸 수많은 뮤지컬 히트작들(<오즈의 마법사>,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이 전혀 순위에 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작품만이 유일하게 그것도 최상위권에 자지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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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최고의 뮤지컬로 손꼽히는 <오즈의 마법사>(1939), <사운드 오브 뮤직>(1965),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하지만 이들보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늘 최고의 영화 반열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이 영화의 경우에도 개봉 당시에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던 영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높게 평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랑은 비를 타고>도 이런 경우에 속한다. 같은 해에 개봉된 역시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An American in Paris, 빈센트 미넬리 감독)이 오스카 작품상을 비롯해 온갖 상을 휩쓸 때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 사용된 노래 중 두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전에 다른 영화를 위해 작곡되어 사용된 폐품들이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대표적인 노래인 Singin' in the Rain도 예외는 아니다. 즉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폐품 활용 차원에서 별 기대 없이 돈 안 들이고 만든 작품이었다. 하다못해 이 영화에 사용된 많은 소품이나 무대 장치도 다른 영화를 위해 만든 것들을 (때로는 몰래) 사용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몇 가지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변두리 연예인이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를 휩쓰는 전형적인 ‘스타탄생’ 스토리라인(들)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스타탄생과는 다르게 그 과정이 너무나 경쾌하고 발랄하여 도리어 그 성공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자신의 성공 과정을 설명하는 진 켈리의 거짓과 허풍으로 가득 찬 내레이션을 고단한 스텐트맨 시절을 겪는 실제 화면과 중첩시켜 반어법적 블랙 코미디풍의 냉소를 슬며시 훔쳐낸다. 스타탄생 스토리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긴 ‘영화 속의 영화’는 또 하나의 스타탄생 스토리인데 여기서 지방에서 갓 올라온 진 켈리가 브로드웨이 에이전트들의 문을 두드리다가 무시당하는 장면은 어떤 비애는커녕 승리감의 엔도르핀이 돌게 만든다. 한편 여주인공(데비 레이놀즈 분)의 스타탄생 스토리가 있는데 이는 영화의 메인 스토리라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녀는 축하 파티에서 거대한 케이크에서 튀어나오는 무희로 출발하여 유성영화시대의 첫 스타로 발돋움을 하는데, 그 과정이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진 켈리의 도움을 받는 신데렐라풍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또한 영화 밖에서 볼 때 신인배우에 불과했던 데비 레이놀즈가 아직은 서툰 그녀의 탭댄스 실력으로 인해 진 켈리에게 온갖 구박을 당하면서도 이 영화를 통해 스타 반열에 오르는 과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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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를 타고>에 나오는 세 가지 '스타탄생' 스토리. 위의 두 사진은 주인공 도널드(진 켈리 분)의 무명 시절, 아래 왼쪽은 케이시의 무명 시절(데비 레이놀즈 분), 아래 오른쪽은 '영화 속의 영화' 브로드웨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무명 배우

 

또 하나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스토리라인은 영화의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의 시대였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복잡다단한 전환 과정이다.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인해 영화는 항상 기술종속적인 처지에 놓인다.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예술영화든 대중영화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맞닥뜨린 가장 큰 쓰나미는 유성영화의 등장이었다. 배우라면 누구든지 느닷없이 발성연습에 목을 매야 했으며, 한 방향으로만 소리를 받아내는 초창기의 지향성 마이크로 인해 배우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온갖 곡예 같은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영화감독은 소음을 내는 카메라와 함께 방음 부스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했다. 진 켈리와 (악녀 역을 맡은 무성영화 톱스타인) 진 헤이건이 얼굴표정으로는 사랑을 나누는 듯이 하면서 실제 입으로는 격렬한 말다툼을 하는 무성영화 촬영 시퀀스는 연기와 현실의 아이러니를 윤기 나게 표현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처럼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인한 온갖 소란을 한바탕의 웃음으로 깔끔하게 소화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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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배우들은 모두 발성연습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스토리라인은 모든 할리우드 영화의 필수인 남녀 간의 애정이다. 사랑이 움트고 시험당하고 마침내는 결실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과정이 영화의 곳곳을 앙큼하게 메꾸어 나간다. 이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이며 때로는 모든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진 켈리의 빗속의 ‘오두방정’ 탭댄스는 바로 사랑을 확인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희열을 담아낸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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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 도널드와 무명배우 케이시의 사랑 이야기는 언뜻 신데렐라 변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케이시는 매우 당당한 자수성가형 여성이다. 그녀는 영화 밖에서도 진 켈리에게 당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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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를 타고>를 영화사의 한 이정표로 만들어 준 것은 누가 뭐래도 빗속에서 춤추는 진 켈리의 '오두방정' 시퀀스 때문일 것이다.

 

진 켈리는 이 영화 전편을 통해 거의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억지 마스크가 아니라는 느낌은 그의 몸이 보장한다. 끊임없이 유려하게 화면을 채워나가는 그의 춤이 그것이다. 진 켈리의 춤은 그와 더불어 우아하고 로맨틱한 탭댄스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프레드 아스테어와 비교해 보면, 다소 거칠고 역동적이며 한편으로는 서민적이기도 하다. 그는 우산과도 춤을 추며 (다른 영화에서) 빗자루와도, 신문지와도 춤을 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춤을 추는 것은 진 켈리만이 아니다. 같은 주연급의 배우 도널드 오코너와 데비 레이놀즈의 합류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오늘날과 같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널드 오코너는 1970, 80년대에나 시작되는 비보잉 혹은 브레이크댄스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춤을 선보인다. 이 춤과 어우러지는 노래가 <그들을 웃겨라>(Make 'Em Laugh)인데 이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배우들이 얼마나 자빠지고 부딪히며 상처받는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해 준다. 환한 얼굴로 노래를 부르며 엮어나가는 이들의 춤을 보면서 덩실덩실 흥겨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롱테이크의 춤 시퀀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발이 부르트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장-뤽 고다르와 더불어 대표적인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의 이 영화에 대한 유명한 예찬을 낳았을 것이다. 그는 이 영화를 수없이 많이 보아서 거의 프레임 하나하나의 연결을 정확히 알고 있을 만큼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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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켈리의 춤과 안무는 기본적으로 우아함보다는 역동성에 방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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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오코너의 <그들을 웃겨라>(Make 'Em Laugh) 춤은 비보잉 혹은 브레이크댄스를 연상시킨다. 그는 이 장면을 찍으면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오늘날 이 영화가 역대 10위의 영화라고 할 만큼 높게 평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기존의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일관된 매끄러운 서사를 떨쳐내고 종종 뜬금없는 어깃장처럼 내용이 삼천포로 빠져들어 거기서 한참을 맴돌다가 다시 돌아오는 내러티브의 분절화 때문일 것이다. 이는 1960년대의 프랑스 누벨바그 이후 오늘날의 모던시네마가 주로 사용하는 소격효과(독일어로 Verfremdungseffekt인 이 말은 관객이 줄거리에 온전히 몰입되는 것을 방지하고 극에 대한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모종의 기법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주창)를 상기시킨다. 게다가 영화 속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후반부의 긴 ‘브로드웨이 시퀀스’에서 보여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컬러풀한 변형, 그리고 뮤지컬의 호화찬란함을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우려내겠다는 듯이 극한까지 몰고 가는 화려한 연출도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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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적으로는 나름 개연성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는 어리둥절할 만큼 스토리가 삼천포로 빠진 가운데 뮤지컬 특유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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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영화' 브로드웨이 시퀀스의 무대는 영화 역사의 초창기에 등장한 독일의 표현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무대의 앞과 뒤, 연기와 현실, 가상과 실제, 영화 속과 영화 밖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놀라운 ‘반전’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 악녀로 등장하는 찢어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화의 말미에서 목소리를 립싱크한 것이 만천하에 들통나고 우리의 주인공인 진 켈리와 데비 레이놀즈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사실은, 그러니까 실제로는, 다시 말해 진짜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데비 레이놀즈가 아니라 바로 찢어지는 목소리를 연기한 진 헤이건이었고 데비 레이놀즈가 도리어 립싱크하여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머리가 약간 띵 해지면서 황홀한 영화의 속임수에 농락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막전막후의 이야깃거리가 영화계의 많은 관계자들을 매혹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더욱 돌출시켰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계 자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평론가나 학자들에게 특별하게 주목을 받는다는 점은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½>(1963)이 100대 영화 중 31위(영화감독들이 뽑은 랭킹으로는 6위),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 감독의 <경멸>(Le Mépris, 1963)이 54위(영화감독 랭킹은 46위)를 차지한 것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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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영화 속의 반전과 함께 영화 밖에서 놀라운 반전의 반전이 있었으니...

 

하여튼 마음이 울적하거나, 이유를 알 수 없이 기분이 다운되거나, 복잡한 현실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을 터인데, 한 가지는 뽕을 맞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는 것이다. 이왕이면 건전하고 합법적인 방법이 좋을 것이기에 이 영화를 통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흥’을 만끽해봄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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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길목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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