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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아는데, 왜 나는 당신을 몰라.'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여인의 외침은 처절하고 절박하다. 스스로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그 자신에게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다른 사람이 헤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기억은 정체성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다움의 상실이고 존재의 부존재를 확인하는 일이기에 더욱 아프다. 일상적 기억의 손상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기억의 망실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일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치매로 인한 기억의 변이가 한 개인의 문제라면 사회적 혹은 집단에게서 문제가 되는 기억이 있다. 대개는 권력에 의한 기억의 조작이 불러오는 문제다. 이를테면 '일본군성노예'나 해방 후의 '미군기지촌 성매매를 가장한 위안부' 문제 등 어떤 권력의 개입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기억 양상의 변조가 그것이다.
두 편의 소설을 통해 기억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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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단편 「내일의 수학자」는 2021년 가을에 『문학과 사회』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수학이 아주 중요한 제재로 활용된다.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과 그를 찾아간 화자는 수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과거 그러니까 기억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나는 내가 아닌 채로 살고 싶지 않아. 차라리 암이었으면 희망이라도 있지. 머리가 시궁창에 빠진 것 같아. 아까는 화장실에서 길을 잃고 여기가 어딘지 몰랐어.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눈물이 쏟아졌어.
치매환자 유이수의 절규는 절박하고 실존적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혼란스럽고, 무작정 달래려고만 하는 병원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고 있지만 치매환자 유이수는, 아마도 자폐성향을 지닌 채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소위 '서번트증후군' 자폐스펙트럼일 것이다. 그것은 간호사이며 유이수의 동생인 김소아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고등학생들이 푸는 문제를 열 살 때 풀 수 있었'으며, 아이들이 '종이접기를 하고 색칠 공부'를 할 때 '그래프를 그리고 도형'을 그렸다. 물론 사회성이 부족해 '친구를 사귀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부모는 그런 유이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의학적 도움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홀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까지가 동생 김소아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온통 수학풀이와 알 수 없는 메모로 점철되어 있는 유이수의 노트에 적혀있는 낯선 이름과 전화번호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는, 그 이름의 주인공인 화자 한지승의 기억과 지금은 유이수라 불리는 김소길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한 인간의 지워진 모습이 조금은 복원되기 시작한다.
한지승의 다른 이름은 한정수이다. 간호사 김소아가 유이수의 노트에서 발견한 유일한 이름 한정수는 오직 김소길만 불렀던 이름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보이지 않는 0도 이해하고 음수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정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지승은 한정수이고 김소길은 그의 생모였던 것이다.
엄마는 내게 단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다. 말로도 상처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정하지 않았다. 씻겨 주었으나 안아주지 않았고 친절했지만 사랑한다, 말해준 적은 없었다.
한지승 아니 한정수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김소길의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면 분명 낯선 것이지만, 정상적인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폐스펙트럼인 김소길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분명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답답함에서 오는 결핍, 그것은 받을 것을 덜 받아서 느끼는 결핍의 감정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을 것이다.
정수야, 나를 지켜줘.
일곱 살의 어린 정수는 떨며 속삭이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알아챘다. 그가 결국 버려질 것임을. 그래서 모든 것을 외우기 시작했다. 엄마의 모든 것, 심지어는 소리와 공기, 어둠과 빛 따위 까지. 기억은 '중요해서가 아니라 하도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담석이나 혈전처럼 물질이 된' 그것이라고 유이수의 노트에 기록된 것처럼 말이다.
치매환자 유이수는 그렇게 형성된 과거와의 싸움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간호사인 동생에 의해 요양병원에 입원되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이름도 바꾸고 동생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녀가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김소길로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망실된 기억을 복원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녀다움인가.
유이수는 요양병원의 모든 프로그램도 거부하고 어느 누구와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간호사 김소아의 전화를 받고 그곳을 방문한 정수가 그녀의 노트에 쓰여진 수학풀이를 보고 무심코 '괴델인가? 불완전성정리?'라고 중얼거린 말에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수학은 그녀가 놓지 않고 있던 외부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의 열쇠였던 셈이다.
어떤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누가 옆에 있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0과 1로 만들어진 이진법처럼 고요히 연산할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 세상의 시간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땐 눈빛도 달라지고 말도 도렷해진다. 특히 나와 있을 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엄청나게 말을 많이 했다. 무한이나 연속, 증명 같은 수리철학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 했다.
퍼즐조각이 얼추 맞아 갔다. 아마 그녀도 한지승이 자기의 과거를 털어놓기 전에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한지승은 한정수이고 아들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다가갈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게 김소길의 원래의 행동패턴이 아니던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죽어간 요양원 치매환자를 떠올리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때 이미 느꼈을지 모른다.
끝끝내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못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울기만'한 그녀가 '얼음처럼 차갑고 겨울처럼 쓸쓸한. 그러나 달려가 빠져보고 싶었던 슬픈 웅덩이와 구덩이'같은 눈으로 정수를 보았을 때, 증명할 필요도 없는 문제는 복잡한 수식과 풀이 없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치매환자 유이수에게 기억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유이수는 그녀를 향한 편견과 힘겹게 싸우면서 겪게 되는 좌절과 절망의 횟수만큼 기억의 파편화는 심화되었을 것이며, 종국에는 망실되고 뒤엉키며 인출불가능의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켜켜이 쌓인 기억의 층위에 유이수 아니 김소길의 김소길다움이 다양한 무늬로 찍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드디스크에 난 복구 불가능한 오류처럼 되살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평지돌출의 돌부리일 수 없으니 기억이 없이 무엇을 생각해내기란 어려운 법이다. 수많은 시냅스와 뉴런을 오가는 전기화학적 작용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생각이라고 한다면,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생각'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돌팔매 같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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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 2022년 겨울호에 실린 황모과의 단편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는 과학소설이다. 이 소설은 '기억의 조작'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미래에 있을 법한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에도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뿌리 깊은 '기억 손보기' 시도가 병치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우리 사회는 동일한 사태에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시선이 갈등과 왜곡의 줄타기를 벌이는 비정상적인 사회인지라 더욱 그렇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김순자로부터 '산업위안부'의 실체를 알아내려는 것은 그가 속한 기관인 베스티지(뇌적腦迹기록물)관리위원회의 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사 연구자이면서 구술 생애기록사였던 엄마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김순자의 증언과 엄마 양유희의 증언을 교직하는 얼개를 가진다.
화자의 엄마는 영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죽은 자와 영적으로 연결되고 그들의 말을 이 세상에 대신 전달해주는 능력을 가진 양유희의 뇌적腦迹에서 김순자의 존재가 드러났던 것이다. 양유희가 말년에 김순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뇌적 패턴을 자기의 뇌활동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김순자는 산업위안부다. 일제강점기에 탄광이나 철광 혹은 관련기업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주어 노역장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정부의 묵인아래 도입된 소모적 존재로 '일본군성노예'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업이 관리하고 휴지조각이 될 금권金券이란 걸 주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점은 2040년이다. 2040년의 화자가 2001년에 죽은 김순자를 인터뷰하는 것이다. '줌인 통화'라 불리는 시스템을 통해 김순자의 브레인 데이터에 접속해서 산업위안부로서의 피해사실을 밝혀내는 일이 화자인 '나'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김순자의 기억은 심각하게 오염이 되어있고 그렇게 만든 것은 당시의 전범기업이었던 미쓰마루 탄광회사의 자회사인 아소후토 센터라는 곳이다. 산업위안부를 관리하고 위안소를 운영했던 탄광회사는 김순자의 기억에 '위로를 빙자한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 당시를 새롭게 색칠하며 정보를 오염시켰'던 것이다. 김순자는 경험하지도 않은 기억을 이식받고 당시의 참혹함 위에 아름다운 순애보로 채색된 당시를 추억하며 존재하는 허깨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소후토 센터에서 심어준 가상의 연인 김필남과의 아름다운 기억을 헤집어 이면을 들춰내는 '나'가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이게 다 거짓말이라고? 사랑도,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면 도대체 뭐가 남는데?"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거짓 위로가 아니라 아픈 진실로.
"순자 씨, 필남 씨 얘기를 만들어준 아소후토 센터가 어떤 곳인 줄 아세요?"
"몰라!"
"미쓰마루 탄광의 자회사예요."
"그래, 그래서 금권을 지금이라도 쳐주겠다 했다고."
아소후토 센터는 브레인 서포터에 깃든 순자 씨의 뇌적 데이터에 접근을 했다. 위로를 빙자한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당시의 기억을 새롭게 색칠하며 정보를 오염시켰다. 순자 씨마저 자기 기억이 헷갈렸고 주면 사람들도 이를 치매 증상만으로 여겼다. 그 결과 순자 씨 얘기에는 신빙성이 사라졌다. 금권을 주고 하룻밤 여자를 샀다고 증언하는 사람들만 남았다. 순자 씨의 이야기가 사라진 곳에서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가해자 측 서포터일 뿐이었다.
사실 김순자는 아쿠후토 센터로 가는 길에 죽었다. 그의 기억을 완벽하게 조작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음 이후의 기억 데이터를 손대는 것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기억 조작 주도자들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김순자의 브레인 데이터에 가해진 기억조작은 한 개인에게 행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소환하여 결국에는 집단의 기억을 되살리고 진실을 추출해내는 마중물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회한 어린 기억을 가진 '산업위안부 김순자'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사내 김필남과의 사랑이야기를 심어주어 '순애보 준코'로 만들어준 전범기업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일본군성노예' 문제에 기억왜곡을 획책하는 현실과 나란히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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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대로 기억은 온전한 채로 보존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 면에서의 간섭에 취약한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기억은 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고 존재의 현실태이다.
「내일의 수학자」의 치매환자 유이수는 기억이 지워져 가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공포로 다가온다. 그 공포의 원인은 '당신은 나를 아는데, 나는 왜 당신을 몰라'라는 절규와 '나는 내가 아닌 채로 살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절박한 목소리에서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인식 그리고 몰이해. 결국 정체성에 관한 의구심이 목을 조이는 것이다.
반면에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의 김순자는 자신의 기억에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조작되고 심어진 환상에 스스로 만족하여 실상을 파고드는 이에게 반발하고 있다. 그녀의 정체성은 순애보적 환상에 가려져 인식 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김순자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있는 곳은 그녀의 정체성을 감추려고 시도하는 전범기업이다. 산업위안부 김순자의 기억과 정체성은 개인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피해자집단의 기억을 소환하는 단초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군 성노예'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던 계기가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증언이 다른 피해자들의 기억을 소환하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기억은 피해자집단의 기억이 되고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뉴런과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변화는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만들었다. 자기를 초월하여 도덕이라는 조금은 낯선 관념을 만들어 내고, 푸른 하늘 너머의 어떤 존재를 인식하며 존재의 근원을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기억이었다. 어제 보았던 것, 했던 일을 잊지 않음으로 그것들 위에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잊지 않고 되살릴 수 있는 데이터들이 기억이 되었다. 기억은 인간다움의 굳건한 성채요, 문명의 초석이었으며 또한 죽음을 향한 공포의 발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온전한 아니 온전하다고 믿는, 그래서 언제든 인출하여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은 '자기다움'의 가장 원초적인 질료이며 정체성의 배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 건 그것이 훼손되거나 망실되는 것은 비극이다.
문명의 흐름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오만함이 스스로를 물질적 이익의 도구로 격하시키는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대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며 그 시작은 기억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리라.
〔사족〕 산업위안부에 대한 자료 읽기
https://www.ildaro.com/8541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561110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