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가난한 자의 방 정원일기
종강일만 기다렸다.
2학기가 끝나고 일주일 후 시작된 겨울 계절학기. 그것 때문에 빗나간 운명. 계절학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생태마을 집에 책꽂이와 스크린을 설치하고 책과 영화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목민처럼 떠도는 상태로 종강일만 기다렸다.
종강일에 일 년째 읽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1>을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채 난독증을 의심했다. 그리고는 인디영화관에서 인도네시아 영화 <나나>를 보았다. 영화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채 먼지 가득한 대전에서의 마지막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다음날 도보순례를 시작했다.
해남의 나무가 그 소식을 알고는 논산 ‘내 마음 속 작은 방 하나...사포리♡’햇님쉼터한의원에 1박을 부탁해 놓았다.
연산에서 논산까지 걷고 나서 가보니 6년 전에 와봤던 곳이었다.
당시 인문학서점 영어원서 읽기 모임에서였다.
희한하게 그 시절과 지금의 내 상황이 비슷했다. 다만 과거에는 이성을 잃고 있었고 현재는 차분한 상태라는 점이 달랐다.
내가 뜻한 바도 아니었고 전혀 계획도 없었지만 6년 전의 인연이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원장님은 한의원에 가득한 금세기 영적 스승들의 사진과 매우 흡사한 외모다. 덥수룩한 흰머리에 구부정한 자세에 가운이 아닌 두터운 점퍼 차림. 한의원장이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습의 원장님은 예전보다 더 많이 낮아지신 느낌이었다.
나무가 소개해 준 공주 보화터 주인인 감꽃이 끓여준 굴떡국을 먹고 원장님과 셋이 밤 산책을 나가서 오래 걸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장님은 구십 넘은 노모의 미소를 보여주셨다. 그런 사랑을 한 번이라도 받으면 다 낫게 된다고 하셨다. 알고 있다. 그런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 내가 나으리란 걸. 그러나 그게 노력으로 될까? 우리 할머니가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제 사랑 제가 끼고 있는 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내가 뭘 잘해서 사랑받은 게 아니었다.
산책 후 곱고 감각적인 감꽃과 따스하면서도 예리한 원장님과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원장님은 네팔 안나푸르나, 러시아 바이칼 호수, 라다크, 러시아, 남미 등 세계의 영적인 곳을 순례하는 진짜 순례자셨다. 들뜬 내가 물었다.
“(제가 가기에) 안나푸르나가 좋을까요? 바이칼호가 좋을까요?”
연말부터 하루 만 원씩 붓고 있는 6개월짜리 <데일리 워킹 적금>이 만기 되면 안나푸르나로 떠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면 준비가 안 돼서 가도 볼 것을 못 봐요. 3개월에서 6개월 치료 받고 가요.”
맞는 말씀이었다. 나는 환자였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환자. 어려서는 부모의 사랑에, 젊어서는 신의 사랑에, 중년에는 연인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환자. 조갈증을 해소하려고 소금물을 들이켜지만 결국 더한 고통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마는 환자. 원장님은 준비가 되어야 원하는 대상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다.
원장님은 6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선희의 <장미>를 틀어주셨다. 대형 스피커로 들리는 스테레오 사운드가 빵빵했다. 6년 전에는 그 정열적인 노래에 감탄했었지만, 지금은 우악스러운(이선희 팬들에겐 미안합니다.) 사랑을 거절했다. 왜 그 음악을 트셨냐고 여쭤보니 50대 여성들이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요. 느끼세요.”
원장님은 머리 말고 가슴을 쓰라고 하셨다. 두 달여 전 애니어 힐링 선생님은 내게 가슴 그만 쓰고 머리를 쓰라고 하셨는데 대체 누구 말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MBTI 중 NT에서 NF로 변한 건 괄목할만한 변화였다. 어느새 점점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서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있다. 아직도 멀었지만.
“별님에겐 ‘선함’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느껴진다고 하셨다. 내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을 보면 그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고 그들을 위해 불타오르는 것도 아셨다. 하지만 이제는 ‘고통’보다 ‘아름다움’을 보도록 노력하라고 하셨다.
좋아하는 이태리 음악을 들으니 내 안의 내 안의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원장님은 내 안의 그 소녀를 꺼낼 수 있다고 하셨다. 경험상 그건 한의학이나 명상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원장님이 <가난한 자의 방>에 머물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다. 나도 그래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셨다.
“비용은요?”
“친구에게는 공짜예요.”
그렇게 첫날은 원장님이 아궁이에 나무를 때주신 한의원 황토방에서, 그 이튿날부터 사흘 동안 나는 가난한 자가 되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절, 산상수훈 8복의 첫 말씀이다.
세 평짜리 ‘가난한 자의 방’은 햇님쉼터한의원의 가운데 있다. 그 옆에 ‘순례자의 방’이 나란히 있고 사이에는 차양이 있다. 그 앞에는 삼층석탑이 다소곳하지만 옹골차게 서 있어 마치 사찰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방에 처음 들어가 앉았을 때 안온한 느낌이 매우 좋았다. 햇살 때문이었다.
남원 귀정사 낀방처럼 전면 창에 대나무에 끼워진 면으로 된 커튼이 양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누런 잔디가 펼쳐져 있고 소나무와 억새와 탑이 보였다. 한의원인 본채는 제일 안쪽에 배치돼 있고, 가난한 자의 방이 가운데에 있어 마치 1800평 대지의 중심에 위치한 듯했다. 손님에게 안방 자리를 내준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원장님은 그런 분이셨다.
화장실이 한의원 안에 있으므로 퇴근하시면서 내게 한의원 열쇠를 주고 가셨다.
열쇠를 맡기다니……. 원장님 말씀대로 어쩌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백조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듯.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지도 모르겠다고. 그중 원장님은 백조를 넘어선 신과 인간의 중간계 천사일 지도…….
그렇게 정읍댁, 곡성 강빛마을 주인, 관지, 왜가리, 햇님쉼터한의원장님까지 다섯 번째로 내게 집을 맡긴 사람이 나타났다.
연산, 논산, 강경, 익산, 군산과 금강.
산 따라 물 따라 65km를 걷는 동안 햇님쉼터한의원에서 머물렀다.
월요일 밤엔 명상 시간이 있어서 편의점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지만, (그날도 원장님은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지만 낯가림 심한 내가 사양했다.) 나머지 아침과 저녁을 한의원 주방에서 해결했다. 회원들의 요리 솜씨가 출중해 끓여놓고 가신 떡국과 미역국이 훌륭했다. 밥과 김치만 있어도 든든한 한 끼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땡땡이 노란 커튼 너머 햇살이 비친다. 전기패널 열이 아쉬워 이부자리에서 뭉기적대기를 한 시간여. 옷을 갈아입고 이부자리를 털어 개고 커튼을 젖히면 말간 정원에 다소곳한 탑이 밤새 보초를 선 듯 서 있다. 미황사 달마선원에서 자고 일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동남향 집답게 붉은 기운이 돌고 햇님이 떠오르면 햇님쉼터한의원은 기지개를 켠다.
한의원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전창이 있다. 아득한 산 너머 햇님의 따사로운 빛이 억새 사이를 지나 창문을 넘어 몸을 감싸면 나도 모르게 양팔을 벌리게 된다. 우주의 빛에너지가 세포를 깨운다.
창틀 위 체코 무용수가 춤을 추고 있고 창틀 아래에는 러시아 발레리나가 한 다리를 90도로 들고 한 팔과 평행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포즈를 취해 본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커피 믹스를 한 잔 타서 마시면서 긴 빗자루로 한의원 거실을 쓴다. 그리곤 짧은 빗자루로 현관을 쓴다.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고 빗자루와 쓰레받이로 청소하는 기분이 좋다.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든지 청소를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하겠지만, 왼손엔 찻잔, 오른손엔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이튿날 아침에 원장님이 걸을 때 먹으라고 과자와 미니 약과를 한주먹 챙겨 주셨다. 귤도 많이 가져 가라셨는데 무거워서 사양했다. 저녁에는 퇴근하시다 말고 다시 한의원에 들어와 쌀과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설명해 주고 가셨다. 그러면서 여태 내게 집을 빌려준 사람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여기 있는 것 다 먹어도 돼요.”
대전 원도심레츠에서 사 온 유기농 포도주 한 병 들고 와서 나흘을 밥과 국과 반찬과 커피와 물과 과일을 먹고, 씻을 물과 화장실과 방을 쓰고 간다. 원장 행세를 전혀 하지 않는 한의원 주인은 공손한 몸가짐과 겸손한 마음으로 ‘혼자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사람들을 피어나게 하는 게 제일 좋아요.”
사람들의 굽고 구겨진 마음과 아픈 몸을 피어나게 해 주는 데서 기쁨을 얻는 이기웅 원장님. 그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해주는 진짜 치료자였다.
순례자는 천사가 돕는다.
길을 걸으며 언젠가부터 터득한 사실이다.
어설픈 순례자인 나는 가는 데마다 천사를 만난다. 그래서 먹고 자는 데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지극히 드물지만 나를 거절한 집도 있었다. 그런 집에서는 발의 먼지를 털고 나오면 된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누가복음 9:5]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환대받지 못하는 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들이 복 받을 기회를 내쳐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브리서 13:2]
나는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제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에 해악을 끼치려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막연히 믿는다. 내가 빈손으로 가서 대접받고 떠나면 나를 대접한 이들에게 복이 내릴 것을. 왜냐하면 하늘은 그렇게 돕는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받는 데만 익숙해서 어디 가서도 계산하지 않는 종교인들이나 정치권력자들은 비난의 대상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35~40]
복이 있으라. 베푸는 이들이여.
방을 구하려고 기를 쓸 때 방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돈을 마련했고 계약서만 쓰면 됐었다. 그렇지만 두 번이나 그 기회를 놓치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집은 운명임을. 그리고 어딘가에 내 방이, 내 집이, 내 정원이 분명히 있으리란 걸.
가난한 자의 방에서 나는 진짜 가난한 자였다.
잘 때와 걸을 때 옷이 한 벌씩이었고 속옷과 양말만 매일 빨았다. 온종일 걷고 돌아와 냉기 가득한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머리 감고 샤워하고 찬밥을 뜨거운 국에 말아 먹었다. 비단 외적인 요소뿐만이 아니었다. 내 영혼은 걸인처럼 버려졌고 굶주렸고 헐벗었다. 거지 왕자처럼 다락방 소공녀처럼.
사람이나 사물을 보면 그 세포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는 이기웅 원장님에게 나는 ‘선한 환자’였다. 원장님은 아픈 나를 한의사 대 환자로서가 아니라 순례자 대 순례자로 돌보셨다.
원장님은 모르신다. 내 인생의 2막 마지막 장을 가난한 자의 방에서 보냈음을.
이제 나는 3막 인생을 펼칠 것이다. 그 첫 정원이 어디가 될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브런치에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