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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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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햇살이 아프다

posted May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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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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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내건 깃발이 바람에 나부낄 때, 바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공모자가 되어가고, 바람을 타고 떠도는 핏기 없는 말은 비수가 된다.

 

풍경은 때로 폭력이 된다. 햇살 좋은 봄날의 풍경이 더러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무음으로 보여주는 흑백의 영상 속 군중들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하지만 도무지 알 수는 없다.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하는 인파 앞으로, 파지가 얹혀있는 유모차를 개조한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파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흑백의 영상은 깊게 파인 그녀의 주름을 더욱 강렬하게 보여준다. 4월의 햇살이 역시 흑백으로 환하다.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병원 검사를 하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창 넓은 커피숍 창가에 자리 잡고 오규원을 펼쳐든다. 출간된 지 꽤 오래된 그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작가와의 동병상련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관계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심신의 황폐화 때문이다.

 

오규원은 시인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머쓱해진다. 요즘 듬성듬성 읽고 있는 그의 책은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인데, 시인이 병든 몸을 의탁한 영월의 강가 농가에서의 사유가 탁월한 감성의 문장에 실려 나분거린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은 시간을 훨씬 건너뛴 시점에 모퉁이 커피숍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삼십여 년 전에 쓰인 그의 문장을 소환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4월의 햇살은 아프다. 여름의 그것처럼 강렬하지도 않고, 겨울의 그것처럼 창백하지도 않다. 살갑지는 않지만 정겨운 사람의 눈길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더 아프다. 엘리엇을 모르는 사람도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다. 불모와 불임, 불신의 황무지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잔인한 사월을 감지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어쨌든 아프고 잔인한 것은 슬프다.

 

슬픔은 감정이지만 오히려 감각에 가깝다. 피부가 촉각을 감지하는 센서 같은 것이라면, 슬픔도 그렇게 감각된다. 그냥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이해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감각인 것이다. 따뜻한 햇살의 부드러움에 모공을 한껏 열어젖히는 피부의 행복함과 산들바람이 주는 간지러움을 감지하는 피부의 섬세한 느낌은, 송곳에 찔리는 아픔을 감지하는 피부의 강렬한 저항은, 슬픔이라는 감각의 반응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슬픔은 역시 감정이어서 주어지는 감각만큼의 크기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의 재구조화를 거쳐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된다. 단순한 슬픔으로 잠시 떠 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복잡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또 다른 모습으로 이미지를 바꾸면서 '기억해야 하는 슬픔'이 되기도 한다.

 

슬픔은 눈물이라는 기표를 동반한다. 물론 눈물은 약간의 불순물을 포함한 액체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를 알고 있다. 슬픔이 지극하면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법이다. 눈물이 없는 눈물은 지하로 잠복해 흐르다 용천수로 분출하는 눈물의 원인자다. 그러므로 역시나 눈물은 슬픔의 기표이다.

 

오규원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된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새가 있다. 슬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이 새의 이름은 스쿠온크. 보르헤스가 『상상 속의 동물들』이라는 책을 편집했다던가. 그 책에 언급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데, 오규원의 전언에 의하면 보르헤스가 윌리엄 콕스의 『벌목꾼의 숲의 무서운 동물들』에서 빌려 온 모양이다. 우선 오규원의 책에서 인용해 보자.

 

- 이 새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불행한 동물이다. 이 동물은 누구나 쉽게 추적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계속 울고 다니므로 언제나 눈물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더 이상 도망을 못하게 되거나 혹은 사람들 때문에 놀라게 되면, 이 새는 눈물로 변해서 흘러내린다.

 

아, 슬픔이고 눈물인 새라니. 그러나 눈 들어 돌아보면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 스크온크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이 되어버리는가.

 

아홉 해를 견뎌낸 눈물이 있다. 그들에게 4월은 통각 그 자체이다. 그리움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는 간절함이다. 눈을 뜨지 못하게 할 정도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을, 소란스러운 공원 앞 리어카 노점에서 사 먹던 불량스러운 소프트아이스크림의 부드러움 같은 산들바람을, 햇살을 반쯤은 투과시켜 버리는 셀루판지 같은 그러나 잎그물의 생생한 무늬가 신비한 어린 나뭇잎의 명랑함을 함께 보며 쉼 없이 조잘대던, 혹은 살가움은 적당히 감춘 퉁명스러움으로 쑥스러운 애정을 드러내던 '미래'가 부재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홉 해를 넘기고 있는 것이다. 아홉 해만큼 세상은 변해있지만, 아홉 해만큼 인심도 변해갔지만, 분명한 것은 함께 웃고, 투정 부리고, 짜증을 내고, 그리고 사랑하던 그들의 '미래'가 곁에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 옅어져 갈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그리움의 농도는 짙어지기만 했고, 눈물은 심연의 지층을 따라 새로운 수맥을 형성해 갔다. 그리고 탄산천의 기포로 떠오르는 물방울이 되어 세포 하나하나에 젖어 들어 끝끝내는 몸을 이루었으며 삶이 되어갔다. 스쿠온크가 눈물의 몸을 바꾸어 날개 짓을 하며 날아가게 하는 것은, 슬픔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화의 과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쇄된 진실의 문이 열려야 하고, 망각을 강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을 막지 말아야 한다. 4월의 스쿠온크를 길들이려는 불가능하다. 역사와 시간은 전적으로 그들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속에 깃든 4월의 잔인함을 빙자한 서로 다른 깃발들이, 자신들의 구호가 그려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슬로비디오로 흘러간다. 그들이 가 닿는 지점의 풍경이 궁금하긴 하지만, 썩 유쾌한 곳은 아닐 것 같아 발길을 돌리는데 문득 오규원의 시 한 편이 전두엽을 스치며 떠오른다. (그러나 부쩍 부실해진 전두엽을 신뢰할 수 없는 나는 시집을 펼치고야 만다.)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 「산과 길」 전문

오낙영 사진.jpg

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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