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보화터 정원일기
개강 이틀 전에 휴대전화기로 문자가 한 통 왔다.
내가 어디서 머물고 있는지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산책하면서 내 집을 찾고 계셨다고. 당분간 보화터에 머물면서 집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논산 햇님쉼터한의원에서 만난 감꽃이었다.
감꽃이 해남 나무로부터 내가 집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때는 지난가을이었다. 우리는 해가 바뀐 겨울에 한의원에서 처음 만났다. 감꽃은 혼자 조용히 있어야 하는 내게 자신이 불쑥 가면 방해가 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주인이 객 눈치를 본다는 게 말이 되나. 보화터는 감꽃이 숨 쉬고 싶을 때 오는 공간이었다. 가끔 들르는 집이지만 그 소중한 공간에 누군가 상주하면 불편할 게 뻔했다.
지난겨울 한의원에서 감꽃이 보화터를 만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집을 어떻게 만났는지, 다 쓰러져가는 그 집을 어떻게 살려냈는지, 집 단장을 끝내고도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 바이칼 호수까지 가서 몸과 마음을 정하게 가다듬은 이야기를.
감꽃은 이름 그대로 감(感)이 예민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나를 만난 후 한 달 반이 지나, 그동안 내 글을 다 읽고 마음을 정하신 거였다. 그래서 더 반갑고 고마웠다.
이틀 후 개강을 했다.
반가운 학생들과 다시 만나고 나서 공주로 향했다.
봄볕이 따스했다.
한 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달리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대도 궁금증도 걱정도 염려도 그 어떤 느낌도 없었다. 단지 청함에 응할 뿐이었다. 오라는 곳으로 가리라. 환대하는 곳으로 가리라. 가서 보고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경로당 앞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갔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보화터가 있었다.
아~ 그 집의 지붕을 보자 별담리 집이 떠올랐다. 가슴이 싸르르 아렸다.
길이 좁아지고 정면에 허연 대문이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한 여인이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윗집에 방문 왔다고 답했다. 사회복지사냐고 또 물었다. 아니라고, 그냥 방문이라고 했다.
그 집 앞에서 골목길을 꺾고 꺾어 언덕을 앞두고 다시 좌회전.
누런 잔디가 깔리고 양옆으로 큼직한 디딤돌들이 박힌 오르막이 갤러리 입구 같았다. 그 길 끝에 우뚝 그 나무가 서 있었다.
감꽃이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내가 여기서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다’고 한 그 감나무.
감나무를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오르막길을 올라 감나무 앞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탄성이 나오는 집이 한 채 있었다. 한옥을 깔끔하게 개조해 오밀조밀 꾸며놓은 집. 자갈을 깔아놓은 마당과 알록알록 타일을 박아놓은 댓돌과 수돗가와 화단과 장독대.
남원의 푸른 옷소매 미술관의 타일과 진도의 관지 하얀집의 앞뒷산과 남원 청명 집의 자갈 정원에 얕은 담과 대전 카페 림 주인의 대청호수 변 집안의 따뜻한 햇볕 드는 거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 집의 주인 감꽃이 봄꽃처럼 나를 맞았다.
“일곱째별이 온다고 꽃이 피었네요.”
대문 없는 입구 모퉁이 하얀 조약돌로 만든 화단에 매화 닮은 작은 꽃이 두 송이 피어 있었다. 후와~ 내 입에서도 꽃술 같은 탄성이 나왔다.
감꽃이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는 몸을 돌려 감나무에게로 다가갔다.
가서 나무에 손을 대고 인사했다.
“나 왔어요. 잘 부탁해요.”
보화터 안은 외경보다 더 멋졌다. 싱크대 앞에 서면 전면 창을 통해 저만치 바라다보이는 아늑한 산등성이와 그 아래 논, 드럼통을 이용한 페치카와 의자처럼 쓰는 온돌 구들, 책상 겸 테이블과 의자, 툇마루에 나무틀 창을 달아 만든 복도와 작은 창으로 빛을 조절할 수 있는 어둑어둑한 방, 큰 창이 난 호텔 못지 않은 건조식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정면 문 위에 보이는 티벳 고원의 카일라스 산. 거실 구들에 앉으면 왼쪽 벽에 걸린 대형 바이칼호 사진의 나무 구름 위로 반짝이는 북두칠성. 천장엔 서까래를 살리고 흔한 백색 대신 벽까지 바른 밝은 황토. 곡성 푸른낙타에서 본 색깔별 노출 전선. 구석구석 섬세하고 예술적인 감꽃의 감각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감꽃은 만두가 들어간 미역쑥들깨국을 끓여주셨다. 갤러리 카페에 앉아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밤이 깊고 우리의 이야기는 더 깊었다.
감꽃은 집으로 갔고 나 혼자 보화터에서 밤을 맞았다. 불을 켜놓고 자서인지 피곤과 와인으로도 이길 수 없는 긴장 때문인지 꿈에서 시달리다 깼다. 몇 시간 후 닭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잤다. 일어나니 날이 밝았다.
복도의 발을 올려보니 감나무 위로 해가 솟아올랐다.
그때 보화터가 동북향임을 알았다.
청소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싱크대 앞 전창으로 보이는 장독대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와 화강암 절구에 녹은 얼음물을 찍어 마셨다. 까딱까딱 몸을 위아래로 움직여 물 마시는 새를 바라보는데 무게 없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작년 3월 초, 남원 귀정사의 첫 아침에도 그랬다. 새가 날아들고 총총걸음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꽃이나 나무의 생명력과는 달랐다. 그들의 활기는 잡을 수 없는 자유로움으로 눈앞에 아른거렸다. 좁쌀 한 알 물어다 주지도 않는데 단지 살아서 보이는 것만으로 새에게 고맙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 애쓰는 모습만으로도 생명의 근원인 위대한 존재는 고마워하지 않으실까.
오전에 다시 오신 감꽃은 차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지난 밤보다 더 깊은 대화를 했다. 밖은 빛이 확장하는 아침인데 우리의 시간은 근원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날 스케줄을 감꽃에게 내주었다. 감꽃이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곳으로 함께 갔다.
칠갑산이었다.
청양의 600년 된 느티나무 앞집에서 뚝배기비빔밥을 먹었다.
그때 감꽃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꺼냈다. 전날 스쳤던 아랫집 여인에 대한 이야기.
칠갑산 정상까지 왕복 7km밖에 안 됐다. 완만한 경사가 산책 코스처럼 편안했다.
우리는 빛섬아트갤러리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그림을 보고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감꽃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낯선 보화터에서 불안해할 나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며 새 거처를 알아보는 게 안심되겠다고 하셨다. 복잡다단한 생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에게 먼저 정리해 주어서 고마웠다. 덕분에 나에게 새 마음이 생겼다. 보화터처럼 예쁜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생각, 더는 다른 사람에 의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말고 내 힘으로 정착해야겠다는 결심.
오~ 내가 쉴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나의 정원은 어디에 있을까?
글 : 일곱째별 / 그림 : 보화터 빨래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