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지질학'의 가능성 탐색을 위한 두 개의 오래된 이야기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이 신작로가 있는 풍경을 정물화로 만들어 버린다. 신작로의 황톳빛은 얼마간의 색이 증발하여 퇴색된 채 들떠있고, 길 양편에 의장병이 도열한 듯 늘어선 미루나무도 이파리에 닿는 뜨거운 햇살에 신경질을 부리듯 되쏘며 반짝거린다. 하늘의 구름조차 흐르는 것을 잊은 듯 멈춰있고, 풍경이 정물이 되는 것에 슬그머니 동의한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리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함성과 쏟아지듯 달리는 모습조차 아주 느린 배속의 동영상이다. 학교를 파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신작로를 따라 달린다. 그들에겐 더위나 뜨거움 따윈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더위를 휘저으며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그들에겐 있는 것이다.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던 녀석이 급하게 멈춰 서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율미기다!"
정물화가 갑자기 활동사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율미기다!"
"율미기다!"
일제히 멈춰 선 아이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율미기 그러니까 유혈목이 주변으로 둘러섰다. 녀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신작로 노변에서 돌멩이를 하나씩 찾아들고 당장이라도 유혈목이를 향해 던질 태세다. 그런 일엔 늘 앞장서곤 했던 기계총으로 인한 원형탈모가 정수리 앞쪽에 두드러진 아이의 눈짓만 기다리는 것이었다. 녀석은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씨익 웃으며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상고머리 아이에게 눈짓을 한다.
"어른들이 그러는데 뱀을 죽이면 암놈이 찾아와서 해코지한다던데‥·"
아이들이 상고머리를 향해 킥킥거렸다.
"그건 으른들이 우덜 재미있는 꼬라지가 뵈기 싫어서 지어낸 얘기여! 율미기 도망간닷! 공격!"
기계총의 단말마에 아이들은 일제히 유혈목이를 향해 돌을 던졌다. 유혈목이는 돌덩이에 몸이 짓이겨지면서도 아이들을 향해 두 갈래 혀를 연신 날름거렸다. 유혈목이의 눈빛이 서늘했다. 흰 피부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밤 상고머리는 밤새 신열을 앓았다. 그 아이의 꿈속에선 아이들의 돌팔매에 죽은 유혈목이의 암컷-사실과는 무관하게 아이들은 죽음 놈이 수컷이라고 단정을 지었다-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쉬익, 쉬익! '아녀, 난 안 그랬다니께!' 뱀을 피해 급하게 달아나도 하냥 그 자리였으며 신발까지 벗겨지고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얘가 낮에 뭘 하고 놀았길래 이리 끙끙 앓는다냐?"
할머니는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연신 아이의 땀을 훔쳐내며 혀를 찼다.
유혈목이의 갈라진 혀가 목을 핥고 지나가자 아이는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듯 몸을 떨었다. 차갑다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그 냉기가 척수를 타고 정수리로, 요추로 전광석화처럼 흘러 지나갔다.
'꼰대덜은 비얌으루 술두 담가 먹으면서 우리헌티는 근처에두 얼씬거리지 말랴. 왠중 아니? 알어? 몰러? 몰러?'
갈라진 유혈목이의 혀는 어느새 꿈틀거리더니 기계총이의 얼굴이 되었다가, 끝도 없는 어둠의 구렁이가 되더니, 모두 사라지고 웅웅 거리는 기계총이의 목소리로 남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뭉개져서 더 이상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도 못하는 소리는 불규칙한 파장으로 아이의 심신을 뒤흔들었다.
"사람이 죽었다!"
수완이 좋아 방조제 공사판 뜨내기들에게 행랑채의 방을 내주고 월세를 받아 꽤 쏠쏠한 수입을 챙기고 있는 곰보 아주머니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 놓았다.
"새벽녘에 뭔가 신음인지 비명인지 심상찮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지길래 또 엊저녁 처먹은 술값을 허나부다 했는디, 아침에 나와 보니 저 끄트머리 방에서 서늘헌 냉기가 도는규. 그래서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니께 저 사람이 거꾸러져 있더라니께. 아이구, 이걸 어쩐댜?"
누가 신고를 했는지 헐레벌떡 들이닥친 지서 김순경과 곧이어 나타난 현장 소장에게 곰보아주머니는 설명인지 하소연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죽은 이는 서너 달 전에 마을에 들어온 불도저 기사였다. 건장하고 제법 잘생긴 얼굴 덕에 매미집 작부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읍내 경찰서에서 감식반이 다녀가고 엠블란스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사라지자, 마을엔 며칠간 터무니없는 정적이 는개처럼 내렸다. 몇몇 씩 모여 뭔가 수군거리기도 하였으나 금기가 작동하는 주술에 걸린 듯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기사가 죽기 전에 꿈을 꿨다네유."
터부를 깬 것은 방조제 공사판 덤프트럭 조수로 일을 시작한 지 달포께쯤 되는 늘미에 사는 김형석이 막내아들이었다.
"꿈에 하얀 도포를 입은 뇌인네가, 나는 자네가 내일 파헤칠 곳에 사는 이무기인디 작업을 하루 미뤄주면 그동안에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겠다, 했다는 거유?"
"이무기? 늙은 뱜 말여?"
"아니 그랬는디 그냥 작업을 했다는 겨?"
마을 사람들은 다시 주술에 걸려들고 있었다.
"오늘 즘심시간에 다른 도자 기사들이 허는 얘기를 들었는디, 그 죽은 기사가 선임자헌티 꿈 얘기를 허면서 하루 쉬먼 안되겄냐고 했다는규. 현장사무실에선 당연히 무슨 말 같잖은 얘기냐, 그렇지 않어두 공기에 쬦기구 있는 거 모르냐, 허먼서 공사 강행을 지시했다는 얘기유."
"그 얘긴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루 성립되지 않으니 그냥 풍문일 뿐이여!"
그중 가장 유식한 축에 끼는 의용소방대장이 과학이라는 말로 마을 사람들이 걸려든 주술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주술은 인과나 과학보다 감염력이 센 법이다.
"아, 그래두 그렇게 해서 사램이 죽었는디, 아무렇지두 않은 얘기로 돌릴 순 읎지유. 안 그류?"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과 이무기가 만들어 내는 환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근디 말유?"
김형석의 막내아들은 뭔가 결정적인 얘기가 있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또 뭔 얘긴디? 뜸 들이지 말고 말햐."
몇몇은 꼴깍 숨 넘기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그 도자 기사가 하는 수 없이 작업을 하는디‥‥"
"하는디‥‥"
"아, 이 사람이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볼라는가, 뜸들이지 말라는디."
김현석의 막내아들은 눈부터 크게 뜨고 혀로 입술을 적셨다.
"도자 궤도 바퀴 밑에‥‥ 눈처럼 하얀 능구렁이가 깔려 죽어 있더라는규! 크기도 어마무시해서 으른 허벅지만큼 굵고 길이가 두어 발은 넘더라는."
"아‥‥"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 요관이 짧은 사람들은 아마 속옷을 지렸을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사방 이십 리 안의 마을로 급속하게 퍼져갔다.
이야기라는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각인되어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위에 다른 이야기가 퇴적되어 지층 속의 화석처럼 잊혀 간다. 그러다 지진이 지층을 갈라 단애를 만들면서 오래된 화석들이 드러나듯이, 견고한 듯 보이는 삶에 가해지는 예기치 않은 충격에 허물어지는 가슴 한편에서 오래된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이야기는 사실 너머에 존재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이 논리 밖에 있기 때문이다. 논리 밖에 있다고 해서 본질을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확장하고 증식하고 변신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가는데, 한순간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그렇게 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시대에 존재했던 이야기는 그 시대의 특징을 담고 있으므로 화석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