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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 세운 듯한 직벽이 갈필로 그린 그림마냥 이어지더니, 협곡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의 절벽은 높이를 현저하게 낮추더니 수직의 형상을 허물고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경사가 조금 더 완만해지는 지점에 길이 나 있었는데, 길이라고 해봐야 두 사람이 콧김을 주고받을 정도로 마주 보며 겨우 비켜설 만큼의 넓이에 불과했지만 분명한 길이었다.
아베스라는 스스로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렘이 심장의 혈류를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었다. 길은 바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이어지며 오르고 있었는데, 고봉준령을 많이 겪어본 그에겐 낯설지 않은 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까. 길은 돌덩이처럼 굳은 토괴 사이로 들어갔는데, 토괴가 마치 거대한 성채의 암문과 같았다.
-아! 여기로구나.
아베스라는 상반된 감정이 혼재되어 괴이하게 터진 탄성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서너 개의 넓은 평지가 계단처럼 이어졌는데, 몇몇 건물이 세월의 무게에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수도자들은커녕 들짐승의 흔적조차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아베스라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가며 그곳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이 무너져 내린 수조 같은 것이었다. 짐작건대 이곳 공동체의 입회식과 갱신서원 때 행해지던 침례의 현장인 것 같았다. 수조 같은 곳과 수로로 보이는 좁고 긴 도랑은 열 걸음 남짓한 곳에서 끊겨 있었다. 오랫동안 의례가 없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베스라는 가슴이 저렸다. 오랫동안 꿈에 그려왔던 곳이 이 지경에 이르러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허물어진 계단을 딛고 올라서자 좌우에 길게 늘어선 건물 두 동이 처참한 형상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왼쪽의 건물은 아마도 식당으로 쓰였는지, 주방으로 보이는 시설과 식기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의 건물엔 나무로 된 침상이 뒤집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견습수좌들의 기숙사였을 터였다.
아베스라는 더 이상 폐사지를 둘러보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몸을 뉘어 밤이슬이나 막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중 가장 멀쩡해 보이는 건물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언덕 높은 곳에는 다른 건물보다 비교적 장중한 모습을 한 건물이 있었다. 거칠게 다듬어진 돌로 벽을 쌓은 모양새가 아마 이 공동체의 예배처소인 그것 같았다. 그곳에서 오십여 걸음쯤 떨어진 곳에 아담하고 단정한 오두막이 하나 있었는데, 거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내야겠군.
아베스라는 나무로 된 작은 출입문의 손잡이를 밀었다. 거칠게 삐걱거리면서 문이 열리자 뜻밖에도 실내는 정갈하게 정돈된 모습이었고 사람이 거주하는 듯 온기도 남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여타의 건물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웬 거렁뱅이가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게냐?
높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뭉툭한 무언가가 등을 내리찍었다.
-어이쿠!
아베스라는 맥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보아하니 예사 거렁뱅이는 아닌 듯한데, 무얼 염탐하려는 겐고?
키가 작은 데다가 등이 굽어 더 작아 보이는 노장이 지팡이를 거두며 물었다. 아베스라는 서둘러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시생이 노장께 인사드립니다. 시생의 무례를 용서합쇼!
아베스라가 거듭 합장을 하며 읍을 하자 노장은 느닷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아베스라는 몸을 날려 노인의 등 뒤에 섰다.
-걀걀걀! 예사 거렁뱅이가 아니라 여겼더니 사실이고나.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아베스라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보아하니 초원에서 온 놈이 분명 허렸다?
아베스라는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읍을 하였다.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시게. 보아하니 사막엘 갔었을 게고, 그래 무얼 보긴 허였는가? 거기에 뭐 볼 게 남았다고 거길 갔었누? 걀걀! (계속)
오낙영(글쓴이,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