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옥경83

길, 저쪽 - 밤의 강물에 스며든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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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저쪽

정찬 | 창비 | 2015

 

- 밤의 강물에 스며든 사랑 이야기

 

아픈 과거 역사의 소환은 때론 피로감으로 외면하고 싶어진다. 최근 상영한 영화 '서울의 봄'처럼 되새기고 싶지 않은 뻔한 서사로 치부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불의에 다시 한번 분노하며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했다. 저자 '정찬'의 "길, 저쪽" 또한 혹독했던 어두운 시대의 상흔을 드러낸다. 70~80년대 고통과 절망의 늪에서 수많은 청춘들을 허우적거리게 했던 야만의 권력에 여전히 심박수가 올라간다. 그래도 소설은 괴로웠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낸 사랑 이야기로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사진작가인 윤성민에게 치열한 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친구 김준일이 있었다. 시인을 동경했던 윤성민에게 김준일은 꿈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거울이었던 김지하를 노래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시대에 저항했던 민주투사다. 도피, 수배, 체포, 고문 등은 그들에게 익숙한 언어가 된다. 유신 체제, 광주항쟁, 80년대의 냉혹했던 시절을 거치며 꿈을 잃어버린 김준일은 사상의 노마드가 되어 낯선 세계를 떠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던 그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40대의 이른 나이에 주검으로 발견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시인에게 사랑도 그를 붙들어 두지 못한다. 김준일을 사랑했던 차혜림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아들 현수와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윤성민은 사라진 존재의 흔적을 따라 폐사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꿈을 카메라에 담는다. 험난한 시대의 폭력이 삼켜버린 죽음들에 빚진 그의 슬픔을 피사체가 품는다.

 

강희우는 윤성민의 첫사랑이다. 성민에게 희우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캄캄한 고립된 공간에서도 그의 가슴엔 늘 희우가 있었다. 성민이 감옥에 있을 때 희우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50대가 된 희우가 늙고 병든 몸으로 프랑스에서 이십 몇 년 만에 돌아온다. 성민은 희우로부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희우가 아닌 딸, 영서였다. 엄마 대신 딸이 전해준 편지를 통해 희우의 삶을 파괴한 끔찍한 사실이 알려진다. 학생 시절 도피 중이었던 윤성민을 찾기 위해 사복형사들이 희우를 강제 연행했다. 자백하기까지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겪는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누군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폭행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죽음도 그녀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몸속에서 꿈틀거린 신비한 생명의 숨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이 희우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기 위하여 모질게 윤성민 곁을 떠난다.

 

영화 "그을린 사랑"이 떠오른다. 교도소에서 임신한 나왈은 쌍둥이 남매의 엄마가 된다. 아이들이 성장한 훗날 폭행자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으로 분노의 흐름을 끊어낸다.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나왈의 사랑이 희우에게 투영된다. 딸은 희우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보석 같은 존재다. 고통과 치욕으로 잉태한 생명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모성애를 뛰어넘는 비현실적인 놀라운 사랑은 슬픔과 절망의 산물인가. 희우는 죽음을 품은 암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죽음은 지우고 싶었던 과거 자신과 화해하고 성민과의 관계도 회복시킨다. 그녀는 삶을 연장하는 의미 없는 수술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성민은 폐허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며 희우가 마주할 죽음마저 사랑할 준비를 한다. 늦은 가을, 희우는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성민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지리산 자락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공간이 상징적이다. 자연에 기대어 살아온 인간이 마땅히 돌아가는 곳 또한 자연이리라.

 

책을 덮으며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周易)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이다.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씨과실이 석과다. 석과는 먹어서는 안 되는 과실이다. 마지막 씨앗을 먹어버리면 나무를 다시 심을 수 없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씨앗마저 삼키려는 권력의 탐욕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우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기에 가능하다. 희망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유기체로 언젠가 길 저쪽에 닿을 수 있다는 꿈을 갖게 한다. 작은 돌 틈에서 피어난 풀꽃처럼 희망의 씨앗을 지켜낸 사랑은 실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레퀴엠 선율이 들릴 듯한 품위 있는 죽음 또한 인간의 존엄을 보여준다. 여전히 어둠의 그늘이 어른거리는 이 시대에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며, 사랑하고, 어떻게 생을 마무리할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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