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기 친구와 결별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까운 관계. 같이 교회를 다녔고 집이 한 동네라 걸핏하면 만나서 산책하고 수다를 떨던,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어떤 속말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이였는데... 무엇보다 우리는 취향도 비슷하고 의견 충돌 같은 것도 없이 워낙 잘 지내서 죽을 때까지 서로의 편이 되어주고 서로의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사실 사연은 사소하고 별것이 아니었으니 그냥 하던 대로 '너니까 괜찮아'하면서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니까 더 안 괜찮은, 지점이라는 게 있고 편하고 오래된 관계에 대한 기대와 당연함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나를 휘갈겨 버렸다.
그래 아닌 건 아닌 거지. 세월 그까짓 게 뭐라고.
나는 더 이상 내 안의 냉랭한 기운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웃을 수가 없었다.
작년에 처음 텃밭 농사를 시작했는데 농사가 잘되었다. 호박 모종 하나를 500원 주고 사서 심었는데 아침마다 호박잎 사이로 호박을 찾아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고추 농사도 잘 되어서 풋고추를 나눠 먹고도 장아찌를 담고 또 태양초로 말려서 김치를 담았다. 바질도 루꼴라도, 양배추도, 당근이랑 수세미도 모두 잘 자라주어서 먹을거리, 나눌 거리가 풍족했다.
나는 텃밭에 매료되었고 올해는 모종을 넉넉하게 샀다. 처음 텃밭을 받을 때는 괜히 게으름이나 들통나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을 했는데 한번 해보고 나니 까짓것, 자신만만해진 것이다.
하지만 올해 농사는 완전 꽝이다. 호박은 수꽃만 피어서 겨우 주먹만 한 것 두 개를 얻었고 오이도 달랑 하나 얼굴을 비춰주더니 시들어 죽어버렸다. 주 종목인 고추는 수확량이 터무니없이 적고 토마토는 때깔은 좋은데 맛이 없고 싱겁다. 그나마 유일하게 선방하던 가지는 저번 태풍에 나무가 댕강 부러져 버렸으니 도무지 텃밭에 올라갈 재미가 없다. 왠지 하늘도 땅도 내 편이라 심기만 하면 다 잘 자라줄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며칠 전 섬 식구들이 정자에 모여 아랫집 밭에서 따온 끝물 수박을 먹는데 내게 물었다.
"한참 뭐 심는다고 해쌌드만.... 먹을 것은 나오요?"
"아니요."
나는 기가 죽어서 텃밭의 실태를 이실직고했다.
"물을 많이 줘도 그래. 싱거워지고."
역시 난 초보였다. 날이 가무니 물이라도 열심히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 '적당히'를 몰랐던 것이다.
추석을 지내러 본가에 갔다가 주방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손에 유리컵을 든 채 넘어져서 손가락을 베고 어깨를 바닥에 부딪쳤다. 옷은 피범벅에 몸을 어떻게 움직일 수도 없어서 119를 불렀다.
두 군데 응급실에서 거절을 당하고 세 번째 응급실에 겨우 도착해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데 속에서는 자꾸 다행이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함께 있던 손주들이 안 다쳐서 다행이고, 깨진 유리 조각이 얼굴에 안 박히고 싱크대에 머리를 안 부딪쳤으니 다행이고.... 식구들이 있어서 아이들만 집에 남겨두지 않고 실려 나올 수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니 감사로 이어지고 어느 순간 먹구름이 걷히듯 몸에서 통증이 떠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웃음이 났다. 나는 괜찮을 것을 알았고 역시나 사진을 찍어보니 결과는 이상 무. 부러진 데도 없었고 신경도 무사했고 어깨가 빠지지도 않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걱정하며 기다렸을 손주들에게 해 주었다.
"할머니 이제 괜찮아."
물론 아이들이 가고 난 후 긴장이 풀려서인지 팔은 다시 욱신거리고 시퍼렇게 멍이 올라왔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딘가. 그저 추석 명절을 망치지 않고 잘 마무리된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난생처음 119의 도움을 받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소동을 겪으며 나는 알았다. 몸은 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고 돌보고 있었음을. 그 아찔했던 순간을 돌아보면 몸은 참으로 침착하고 지혜롭게 각 지체와 가장 충격을 덜 받을 적절한 상태를 의논한 것만 같다. 그리고 내가 뭘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거기에 협조하고 부응해 준 것 같다.
덕분에 나는 내 몸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왠지 물가의 아이처럼 불안하고, 그러니 잘 지키고 챙겨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좀 자유로워졌다. 사실 내 몸이 알라딘 램프의 요정인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내가 가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은 모두 내 몸을 통해 이루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동안 내가 몸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혹시 그 착각들 사이로 사랑이 아닌 사육의 대상으로 취급했던 것은 아닌지 둘러보고 있다.
*
탁. 탁. 탁.
미역 작업이 끝나고 이때쯤이면 들리는 소리다. 바닷가 옆 공터에서 깨를 터는 작업은 소리나 풍경이 단조로워 평화롭다.
시시때때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나의 묵은 때를 벗기듯 생각의 각질들을 털어내고 벗겨주는 일단의 사건들, 인연들이 감사하다. 베어내고 털어내어 알몸을 드러내는 깨알들처럼 나도 언젠가는 이 모든 착각의 옷들이 벗겨져 빈 몸으로 세상 자유로운 넉살을 홀가분하게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