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1부
764킬로미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다
Day 1. 오늘 떠난다
어제 저녁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여정을 마치고 나면 난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기대가 된다고 했다.
순례길 떠나는 날 아침, 밤사이 비가 온 탓인지 눅눅하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출발역인 몽파르나스는 구름사이에서 답답하다. 맑고 쾌청한 여름 날씨를 자랑하는 파리답지 않다.
에피소드 1. Bee, 그럼 난 꽃인가?
TGV를 타고 남쪽 보르도 근처로 오니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개이고 햇살이 쏟아진다. 보르도까지 시속 300km를 넘나들며 내달리던 기차는 이제 쉬엄쉬엄 간다. 졸다 깨다 반복하다 에스프레소 한 잔이 아쉬워 몇 칸을 건너 가 식당 칸에서 줄을 선다. 한 눈에 ‘나 한국 성형 미인이오’라고 알아볼만한 젊은이 둘이 내 앞에 서 있다. 모양새가 까미노 할 차림은 아닌데..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삼십일 넘어 걸을 것이니 길을 가며 수많은 인연을 접하게 될 것이고 글로 남을 것이다.
크로와상과 에스프레소를 주문. 오전엔 언제나 이 둘이 정답이다. 다시 몇 칸 건너와 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앞자리 마담 둘이 서서 이야기하다 날 보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어쩔 줄 몰라한다.
Je ne parle pas français (저느빠흘레빠프헝세; 저 불어 못해요) 이렇게 말하니 ‘Bee on your head’라 한다. 이마로 손을 가져가니 그제야 벌 한 마리가 머리에서 떠난다. 난 웃으며 덧 붙였다. ‘Maybe she likes me!’ 상황은 그렇게 모두가 웃음지으며 종료..
에피소드 2. 첫날 밤을 맞이하며
첫 밤, 설레이는 말이다.
파리에서 떠난 열차가 오후 한시쯤 까미노 여정을 시작하는 동네에 도착이라 첫 날 일정은 무리하지 않도록 역에서 8km 떨어진 Orisson refuge로 예약을 했다. 까미노 도상의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치고는 꽤 비싼 38유로이다. 여기엔 침대 하나, 저녁식사와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다.
출발지인 생장드피드포르에 도착하여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순례자 사무실이 점심시간으로 한 시 반에 문을 연다고 하니 별도리가 없다. 순례자 여권을 만들어야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근처를 배회하며 문 열기를 기다렸다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워야 할 것 같아 순례자 사무실 앞에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익숙한 멜로디다 싶어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80년대 록 그룹 Aerosmith가 불렀던 “Dream on”이라는 곡을 보사노바 풍으로 편곡하여 부르는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다.
‘Sing with me, sing for the year, sing for the laughter, sing for the tear’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느지막이 일어서니 두시 가까이 되었다. 순례자 사무실은 한바탕 사람들이 지나가고 고요하다. 조용히 웃으며 순례자 여권을 만들어 주는 자원봉사자와 몇 마디 나누고 햇살이 내리 꽂히는 거리로 나섰다.
길 가다 까미노 표식에 누군가 써 놓은 글귀를 보았다. 너는 너의 노래를 부르고 있느냐고?
‘흰 바람벽이 있어’
생각 없이 걸어질 리가 없다. 생각다 못해 시를 읽기로 했다. 걸으며 읽기가 어려워 낭독을 해서 녹음하고 들으며 걸었다. 대원각이 백석에 시한 줄만 못하다 그랬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 나오는 구절 외롭고 높고 그리고 쓸쓸하다를 되뇌이며 걸었다.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순례자의 전통이라며 각자 일어나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Empty head, empty mind”가 바라는 바라 했다.
글 쓰고 있는데 산중이라 날이 차갑다. 눈을 들어 보니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다.
2019. 7. 11.
오늘의 사족
1. 떼제베 안에서 만났던 처자들을 갈아타는 역에서 만났다. 새 배낭을 둘이 같이 매고 있다. 순례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순례길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2. 방학도 시작하고 휴가 기간이라 순례길에 사람이 많을 것이라 들었다. 하지만 오늘 오후 내내 키가 멀대 같은 독일 청년 한 명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왔다. 알베르게도 같다. 이 청년은 마티아스이다. 부르고스라는 도시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동행이 되었다. 앞으로 글에서 두어번 더 등장한다. 3. 예약한 알베르게 오리손 레퓨지에 들어서니 성은 김인데 다른 이쁜 이름으로 날 부른다. 여기 오늘 한국인 처자가 한 명 더 오는구나 싶다. 4. 길 떠나면 글 써진다는 경험칙에 의존하여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챙겨 왔는데, 아뿔싸 배터리가 다 되었네.. 5. 도시만 벗어나면 넓게 펼친 대지위로 밀밭 옥수수밭 포도밭이 끝도 없다. 지난달 아들들과 프랑스 남부 베르동 계곡 근처 갔다가 지평선과 맞닿은 라벤더밭 보고 좀 질린다 싶었는데 순례길에서 정말 질리도록 밀밭, 보리밭, 해바라기밭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역시 어쩔 수 없이 관련된 글을 쓰게 된다. 6. 이번엔 그냥 걷기로 아무 생각 없이.. 초보 명상이 생각을 비우는 것이라 들었는데.. 비우고 비우고 다 비우고 돌아올 수 있을까?
Day 2. 토플리스와 금기
에피소드 1. 토플리스를 만날 줄이야
어제 읽은 백석의 시구절 중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가 맴돈다.
오늘 아침 길을 나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에 어제저녁 식사 때 앞에 앉았던 브라질 부부가 저 멀리 고개 마루에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다. 고갯마루에 서 있는 성모상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전에 다니면서 그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자연스레 폰을 내밀며 “I wanna take a picture with Mother Mary”라고 말했다.
기실 어제저녁을 먹으며 이들 부부와 상당한 양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까미노 베테랑인 이들 부부는 이미 여러 차례 순례의 경험이 있고 이번에도 아라곤 코스를 마치고 프렌치 루트 가운데 풍광이 수려한 곳만 골라서 다니는 중이었다. 당연히 피레네 산맥 코스는 이들 부부에겐 빼놓을 수 없는 구간이다. 덕분에 10년 전 제주 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까미노 답사기부터 그녀가 한국 사회에 불러온 올레 열풍과 한국인이 유독 까미노에 많은 이유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들은 오늘 피레네 산맥 코스를 마치고 차로 이동하여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아직 내가 꿈꾸고 있는 DMZ 평화올레, 도보다리 산책과 같은 2부 썰을 더 풀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떤 시를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 아차차 아무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하면서 떠오른 시가 권정생 선생님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다. 백창욱 선생이 곡을 붙여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이라는 곡으로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나도 백창욱 선생의 노래로 이 시를 접하게 되었다. 노래를 듣기만 했지 낭독은 처음이다. 읽는데만 10분이 너머 걸리는 긴 시다. 긴 말 생략하고 눈으로 보는 시와 읽는 시는 그 간극이 하늘과 땅이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가 우리에겐 무명인 것과 진배없다.
어디서 시를 녹음할 것인가를 찾다 오늘 30킬로 가까이 걸으며 도착하기 5킬로를 앞두고 피레네 산맥에서 내려오는 맑은 개울가를 만나 좌정하고 앉았다. 무거운 트레킹화를 풀고 수정같이 차고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근다.
장강에 물이 흐리면 발을 씻고 맑으면 갓끈을 담근다 했는데.. 발만 넣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차가움을 앉고 시를 읊는다. 바람소리 물소리 함께.. 내 목소리로 이런 높고 쓸쓸하고 외로운 시를 읽어도 되는 걸까 반문하며 읽는다.
에피소드 2. 금기를 금기하라
리카르도, 그는 로마 출신이다. 이탈리아 출신답게 끊임없이 떠들고 웃고 마시고 피운다. 저녁 식사로 나온 스페인 와인을 맛없다고 흉보며 이탈리아 와인을 줄줄 읊어댄다. 술 마신 이야기, 약 하고 헤롱거렸던 이야기, 여자 친구들과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적나라한 표현으로 싱글거리며 거침없이 직진이다.
식사와 함께 나온 와인을 다 마시고 옆자리 와인까지 먹고, 다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동네 산책하며 오늘 걸으며 뭉친 다리를 풀고 돌아오는데 카페 밖에서 여전히 술잔 앞에 앉아 있다. 불현듯 그가 피우고 있던 말보로 레드를 한 가치 달라고 했다. 2000년부터 피우지 않았으니 한 20년 돼가는 모양이다. 2009년에 한대 태우긴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때 이야기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니코틴에 매이는 것이 싫어 끊긴 했다. 그간 다시 피우는 걸 금기시했으나 오늘 그 금기를 금기한다. 다시 들이 마시는 담배 연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음날 아침 만나 리카르도가 모닝 담배를 꺼내 물다 말고 내게 말을 건다. “어제 담배가 마지막이지?”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니 걱정이나 해라!”
한성에 땐스홀을 허하듯 모든 금기를 금기하라.
2019. 7. 12.
오늘이 사족
1. 얼음장 같은 물에 담근 발을 폰으로 찍다 주변을 둘러보니 휴가 나온 가족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2. 엄마는 토플리스다. 3. 시를 읽다 울컥했는데 급히 수습하고 자리를 피한다. 페르소나를 벗겨낸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머더 메리인가 토플리스 레이디인가! 4. 리카르도는 몸의 부위를 나누어 문신의 테마를 정하였다. 왼쪽 다리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이다. 이 여정이 끝나면 까미노 표식을 새길거라 한다. 순례를 마치던 날 산티아고에서 만난 그는 팔에 새긴 문신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와는 한번도 약속을 한 적이 없으나 순례도중 길 위에서 우연히 계속 만난다.
Day 3. 바스크의 쉴만한 물가
점심으로 복숭아 하나, 에너지바 하나를 먹고 계속 걷는다. 첫 이틀 동안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이라 짧게 걸었다. 이제부터 걷기 좋은 길이라 하루에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고 알베르게를 예약하지 않고 갈 수 있을 만큼 가보기로 작정하고 출발하다. 어제저녁에 옆에 앉았던 헝가리 씨뇨리따 안나마리아를 동네 정류장에서 만났다. 무릎이 시원치 않은 그녀는 오늘 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에 같이 사진 한 장 남겼다.
오전에는 역시 어제저녁 테이블에 같이 있었던 발렌시아 출신 보르하와 함께 걸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바스크 출신이라 바스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길을 가다 ‘Welcome to the Basque Country’라 쓰인 벽화와 그 밑에 스프레이로 조잡하게 Spain이라 써 놓은 걸 보고 민족의 정체성과 국가의 정체성 사이의 괴리가 이들 연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다 헛일이다 싶었다. 여자 친구는 그에게 팜플로냐에 5일을 머물라고 했단다. 장거리 연애를 하는 그들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 정도는 함께 같이 있는 것이 좋겠다 했더니 까미노를 휴가 기간에 마치려면 그럴 수가 없어서 이틀만 같이 있기로 의견 조율을 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조율인지 애처로운 타협인지는 알 수 없다. 현실의 연애질 앞에 정체성 문제는 하찮아 보이기도 했다.
헝가리 씨뇨리따 안나마리아를 다시 만난 건 보르하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작은 마을길에서였다. 왼쪽 무릎이 아픈 그녀는 20킬로 정도를 차로 이동하고 다음 목적지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기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으니 나보고 앞서 가라 한다. 그녀를 지나치는데 괜히 짠하다.
오늘 순례길은 차도를 몇 번 가로지르고 쌩쌩 달리는 차를 마주하며 몇 백 미터를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있다. 아스팔트 위를 걸으니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발바닥이 불이 날 지경이다. 그러다 냇가를 따라서 길이 이어진다. 어디 쉴만한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팔뚝만 한 송어인지 잉어인지 물고기도 보이고 그러다가 다리를 건너는데 앉기에 적당한 돌들이 강가에 펼쳐진 곳을 발견하고 샛길로 접어들었다.
예쁜 딸 두 명, 개 두 마리와 함께 피크닉 나온 가족을 만났다. 한 마리가 유독 사납게 짖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트레킹화를 벗고 물속에 발을 담그고 오늘 지나온 초원을 생각하며 김수영의 풀을 낭독해야지 하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바스크의 시골 인심이 사납지 않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바깥양반이 손짓을 해가며 나를 부른다. 구운 돼지고기와 소시지를 넣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받아 들고 정신없이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며 잡는다. 사양할 이유가 없다. 둘째 딸 소냐가 앞 이빨 빠진 채 배실배실 웃으며 자꾸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쉴만한 물가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다시 힘을 내서 길을 나서는데 너무 잘 먹은 탓인가 시계가 4시를 가리키는데 작열하는 기온 탓인가 땀이 비 오듯 한다. 그러다 다시 안나를 만났다. 언덕 위 싸발디카 마을에 머물 것이라 하며 나보고 어디까지 갈 것이냐고 묻는다. 아침에 그녀가 이 주변에 가장 큰 도시인 빰쁠로냐에 가면 의사를 만나 무릎을 보여주고 치료를 받을 것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내일 짐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이 마을에 머물 거라고 했다.
작은 마을 싸발디카에 유일한 알베르게는 성당과 붙어 있다.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늘 호스트이다. 성당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무료이다. 저녁과 아침식사 그리고 베드를 제공한다. 도네이션 박스가 있어 원하는 만큼 내고 가면 된다. 수녀님이 오셔서 여기 성당이 한국의 성심 수도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저녁 미사에 참석하여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부분을 한국어로 읽었다.
오늘의 사족
1. 내가 이 마을에 머물기로 한 것은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마음밖에는 없는가? 그녀의 아름다움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2. 아대가 없어 압박붕대를 감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도착하자마자 내 무릎 아대를 꺼내 주었다. 3. 오늘 알베르게에서 만난 마틴은 체코 출신이다. 그는 4월 1일 고향인 프라하에서 출발해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해 지금 까미노를 걷고 있다. 카메라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없다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그저 무심하다. 이 친구와도 까미노 도상에서 여러번 동행하게 된다. 4. 까미노 표식과 꽃 화분.. 동네가 어떤 인심을 지니는지 이런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