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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의 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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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3부(9일-13일)

posted Nov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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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3부(9일-13일)


Camino Day 9. Sole vs. Soul

왼쪽이 늘 문제다. 허리도 왼쪽이 늘 시원찮고 그래서 걸을 때 뒤에서 잘 살펴보면 왼발 움직이는 모양새가 좀 다르다. 이번 순례에서도 5일 차부터 왼쪽 발에 먼저 신호가 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작년 각각 일주일씩 걸린 몽블랑과 돌로미티 트레킹도 별 탈 없이 잘 다녀왔으니, 산행도 아니고 평지를 걷는데 발이 조금 아픈 것이 무슨 대수이겠나 싶었다.
7일 차부턴 왼발 뒤꿈치에 작은 물집이 잡혔다. 그 이후 이틀 동안 뒤꿈치에 하중이 실리지 않도록 조심했더니 이번에 왼쪽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다행이라면 발 뒤쪽의 물집은 사라져간다. 나는 물집이 생기면 바늘과 실로 물을 제거하라는 처방을 따르지 않는 편이다. 물집 안의 물을 제거하고 나면 반드시 물집 생긴 부위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다시 피부가 재생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기간 동안 상처부위를 관리하기가 만만찮다. 물집을 그냥 잘 두면 고인물이 다시 흡수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런 진행상황을 일반화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집이 생긴 부위에 따라 고통의 정도가 다를 것이고 무엇보다 사람마다 타고난 것이 다르기에..

 

 

새벽-달과-길을-걷는-순례자의-그림자_resize.jpg

새벽달과 길을 가는 순례자의 그림자

 

 

디지털로 만난 관계
아침 일찍 나왔다. 어제 밤 리오하 와인 마시며 만난 바르셀로나 출신 페레그리노(순례자를 뜻하는 스페인어)가 우리 일행이 하루에 30킬로 조금 더 걷는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레이스하듯 산티아고로 달려가지 말라고 한다. 충고가 아니라 진심 걱정되어 하는 말이다. 이 친구 덕분에 10세기 이후 까미노 형성과정, 까미노 구간 중 밤새워 걷기에 좋은 길,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DMZ 평화올레까지 스페인어, 독일어,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모여 영어로 대화를 했다. 서로 간 얼마나 이해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오늘 어제보다 덥다하여 출발이 이르다. 기실 아침 9시부터 전화로 하는 컨퍼런스콜이 예약되어 있어 다음 마을까지 가서 적당한 곳을 물색해야 한다. 우선 와이파이가 잘 터지며 조용하기도 하고 아침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즉, 회의하기에 적절하며 빵과 커피가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목적에 부합하는 카페가 8시 30분경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나는 여기서 한 시간 이상 머물러야 하기에 사흘간 동행하던 동반자들과 이 마을에서 헤어지다.

 

 

또르띠야,-햄-샌드위치,-신선-오렌지-쥬스-그리고-커피,까미노-아침-식사_resize.jpg

또르띠야(감자와 달걀로 만든 스페인식 오믈렛), 햄을 넣은 바게트 샌드위치, 신선 오렌지 쥬스 그리고 커피를 주문하였다. 이 식단은 순례 기간에 가장 즐겨 먹었다.

 

 

까미노를 핑계로 회의를 미루거나 빠지거나 할 수 있었겠지만 이메일과 컨퍼런스콜로만 진행해오던 연구에서 한 친구가 유학길에 오르게 되어 이번이 마지막으로 회의라 그간 digitally 맺어온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도저히 까미노를 핑계로 빠지기가 거시기 하였다. 밥 한 끼, 술 한 잔 함께 나누지 못한 사이지만 동지 같고 후배 같은 감정이 드는 친구다. 와이파이로 연결한 컨퍼런스 콜은 생산적인 토론이 이어지는 바람에 10시 넘어 끝났다. 걷기 가장 좋은 아침 시간이 그렇게 사라져 갔다. 디지털 세상이 주는 기쁨과 회한이 잠시 공존하였다.

자글자글한 태양 속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헤이, 영쿡’하고 누군가 부른다. 체코 출신 마틴이 으레 그 좋은 웃음을 지으며 걸어온다. 그는 순례길 시작한지 사흘째 되는 날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저녁 미사에 누가복음 중 선한 사마리아 부분을 그가 영어로 내가 한국어로 읽었다. 그는 체코에서부터 들고 다녔던 카메라를 그날 오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무심히 이야기했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다 만났는데 그의 손에 갈색 가죽 케이스의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할렐루야를 외쳤다. 비록 이런 기쁜 상황을 앞두고 할렐루야를 외치기는 했으나 내가 그리 신심이 깊지 않다는 걸 이 글을 읽어 왔던 사람들 중 얼마간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오늘 지나온 어느 마을에선가 그늘에 앉아 어제 사둔 납작 복숭아를 꺼내 마틴과 나누어 먹고 일어서는데 바로 옆에 있는 길 이름이 Calle S. Martin (성 마틴 길)이다. 마틴은 좋아라 하고 바로 그 갈색 케이스에 들어 있던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마틴이-마틴-길을-찍다_resize.jpg

마틴이 자기와 이름이 같은 길을 발견하고는 사진을 찍고 있다.

 

 

순례자에게 발바닥은 영혼과 같은 존재이다. 발바닥에 문제가 생기면 내딛는 걸음걸음 고통을 동반한다. 마틴은 쉴 때마다 발바닥을 쿨다운 해야 한다며 트레킹화와 양말을 벗고 그늘과 시원한 바람에 발바닥을 진정시킨다. Sole이 Soul이다.

2019. 7. 19.

오늘의 사족 1. 서로의 발을 씻겨주지는 못할망정 잘 주물러 주기는 하자. 그리하면 사랑이 다시 샘솟을지도.. 2.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건 먹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오늘 이름 모를 그대를 여러 개 따서 먹었다. 새콤달콤 에너지가 충만해 온다.


이름-모를-과일을-여러개-따서-먹다_resize.jpg

이름 모를 새콤달콜한 과일을 여러 개 따서 마틴과 함께 나누어 먹다.
 

3. 점심 먹으러 들어왔던 식당에서 Estrella(에스트레이야, 별)의 유혹에 넘어갔다. 시원한 맛에 한 잔을 들이켰으나 알콜이 몸 안에서 열을 내고 있으니 이 기온에 더 걷지는 못하리라. 동행들과 만나기로한 마을에 다다르지 못하고 오늘은 이 곳에 머물기로 하다. 레스토랑이 순례자 숙소를 겸하고 있는데 다행히 빈 방이 있단다. 찬물에 샤워하고 복대도 풀고 9일 만에 처음 홀로 방을 쓰다.
 

 

순례자-식사와-에스텔라_resize.jpg

순례자 식사 중 전식으로 나온 파스타와 오후 걷기를 포기하게 만든 에스트레이야 맥주

 

 

Camino Day 10. 적응, 오기나 할까?

어제 오전 그 동안 같이 다니던 일행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어 걷는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보리밭이 지나고 오늘 오후는 숲길이다. 그런데 도로를 내려고 사전 작업을 했는지 폭이 상당히 넓어 걷는 동안 좀처럼 그늘을 만날 수 없다. 숲이기에 기대했던 청량함을 배반하고 내리쬐는 땡볕 아래에서 걷자니 고역이다. 기대가 없으면 마음이라도 적응할 텐데 오히려 기대 때문에 몸이 힘든 상황이다. 희망고문 같은 거다.
 

 

그늘을-만나기-힘든-숲길_resize.jpg

기대를 배반한 숲길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고 걷다.

 

 

어제 혼자 방 쓰며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잘 잘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밤새 세 번이나 깨어 시간을 확인하며 뒤척였다. 몸이 너무 뜨거운 것이 원인이 아닌가 한다. 특히 허벅지와 종아리의 열기가 내려가지 않아 그 열기에 자꾸 깬다. 오늘은 샤워 후에 찬물을 틀어 놓고 다리를 식혀야겠다. 상체는 배낭도 매고 있고 해서 열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비록 자외선 차단용 트레킹 바지를 입었다고 하나 다리는 홑겹 천을 사이에 두고 아침부터 온종일 햇살에 노출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밤에도 식지 않는 다리의 열기 덕분에 오늘 걸으며 순례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긴 바지 긴 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다들 이 따가운 햇살 아래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그 열기를 받으며 걷는다. 이들이 밤잠을 잘 잔다는 것이 신기하다. 젊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오늘도 동행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들이 머문 알베르게를 알려 왔으나 다다르지 못하고 한 마을 전에 머물기로 하다. 시간도 가장 뜨거운 4시가 가까워 왔고 오늘 하루 30킬로미터를 걸어와서 더는 걷기가 버겁다. 왼쪽 발이 계속 신경 쓰인다. 열흘 걸었으니 몸이 적응할 줄 알았다. 아마 순례가 끝나는 날까지 적응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다.

 

 

오늘도-차가운-에스트레이야_resize.jpg

오늘도 어제와 같이 별 맥주로 마무리, 걷고 난 후 찬 맥주는 늘 옳다

 

 

찬물에 씻고 나가서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잠시 눈을 붙였다. 소란스러워 눈을 뜨니 어떤 네덜란드 젊은 친구가 45킬로를 걸어왔다고 한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몸이 단단하다.

2019.7.20.

오늘의 사족 1. 걷다가 든 생각. 삶의 적응, 오기나 할까?

 


Camino Day 11. 으아아 힘들다

오늘은 중간에 마을이 없는 구간이다. 35킬로를 걸어 염두에 둔 알베르게에 왔는데 순례자용 베드는 만석이고 혼자 쓰는 방만 남았단다. 다른 알베르게까지는 다시 1km를 더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홀로 방을 쓴다. 혼자 방을 쓰며 넓은 침대를 독차지하는 것이 이렇게 미안한 줄 일찍이 몰랐다.

출발은 좋았다.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이 시원하고 얕은 오르막이다. 인생도 그렇듯이 올라갈 때가 좋은 것이다.

 

 

구름-속을-걸어들어가듯_resize.jpg

구름 속을 걸어 들어가듯 출발한 아침

 

 

우연인지 필연인지 까미노 시작하는 날 대학 동기들이 달리기하는 모임을 만들어 밴드로 초대를 했다. 선뜻 이 모임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이 움직인 것은 누군가 댓글로 달았던 한마디 ‘아님 걷고’ 때문이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트랙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뛰고 나면 어김없이 허리가 아파서 골골거린다. 그래서 늘 그림에 떡 마냥 달리는 자들을 쳐다보는 신세였다. 달리기 동호회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달리기 동호회에 가입하였고 걷고 달리는 정보를 기록하는 스트라바라는 앱을 깔았다. 매일 아침 출발할 때 앱을 시작하고 도착하여 머무르는 알베르게 입구에서 기록을 마친다. 우리의 명민한 밴드 리더의 요청으로 나의 모든 까미노 여정이 디지털로 기록되어 친구들에게 공유되었다. 오늘 헉헉거리며 35킬로를 걷고 나니 달리기 동호회 리더인 그 친구가 까미노 구간 중에 42㎞를 걷는 구간 없냐고 물어본다. 언감생심 내 체력에 이 기온에 어림없는 일이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 말은 무의식처럼 저장되기 마련이다.

지난 며칠 동안 동행했던 독일 브레멘 출신 마티아스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네팔을 거쳐 까미노에 이른 마우로를 오늘 부르고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점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순례자-길-답지-않은-도로옆-구간_resize.jpg

순례자 길답지 않은 도로 옆 구간

 

 

오늘 11일차 인데 이제까지 길 중에서 가장 까미노 답지 않은 구간이다. 부르고스라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산업지대를 지나오는데 자동차 타이어 만드는 브리지스톤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걷는 길이 족히 3킬로는 되어 보인다. 핸드폰 지도에 코 박고 걷다 가로등에 꽝하고 머리를 받았다. 선방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척하다가 죽비에 어깨를 세차게 맞고 정신이 번쩍 드는듯하다.

나도 꽤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돌아본 축에 속할 텐데 부르고스 성당의 외양은 이제까지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침 주일 미사 시간이라 잠시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외양만큼 화려하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으나 순례자답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다.

 

 

부르고스-성당_resize.jpg

화려한 부르고스 성당 외관

 

 

부르고스를 떠나 다음 마을까지 10킬로이다. 가장 뜨거운 2시부터 4시 사이에 걸었다. 오늘 31도인데 이 기온에도 견디기 힘들 정도이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흘간 예고된 37도와 38도를 오를 내리는 기온에는 어쩔 수 없이 일찍 시작해서 점심시간 이전에 마쳐야겠다. 이 뙤약볕 아래 집을 이고 가는 달팽이나 나나 그저 신세가 비슷하다. 마티아스는 길을 걷다 달팽이를 만나면 길옆 풀숲에 옮겨다 주곤 하였다.
 

 

뙤약볕-아래-달팽이_resize.jpg

뙤약볕 아래 집을 짊어지고 기어가는 달팽이

 

 

인생 뭐 별거 있겠나. 여건이 주어졌으면 맞춰 살아야지.

2019. 7. 21.

오늘의 사족 1. 마티아스는 오늘 부르고스에서 까미노를 마친다. 그는 자폐증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서 일한다. 달팽이를 대하는 그의 성정으로 보아 그는 아이들을 잘 돌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마우로는 다리에 통증이 와 오늘 천천히 걸어서 알베르게에 늦게 도착했다 한다. 그는 통증으로 오늘부로 까미노 순례를 중단한다. 젊은 그가 지고 다니는 배낭 무게는 내 것과 비교해 두 배는 된다. 짐이 가벼워야 오래간다. 평범한 진리다. 3. 마티아스와 마우로를 만나기 위해 부르고스 성당 근처에서 어슬렁거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그들의 소식은 메신저를 통해 들었다.

 


Camino Day 12. 믿음이 좋다는 것에 대하여

보통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함께 잠을 자는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면 자연스레 페레그리노(순례자 또는 도보여행자를 뜻하는 스페인어)들과 말을 섞게 된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왜 이 길에 나섰느냐이다. 할 말이 끊어져 침묵을 견디다 못한 질문일 수도 있고, 예수의 제자가 걸어간 믿음의 길을 수행하는 정신으로 묵묵히 걷는 그리하여 질문하는 이의 간절한 인생의 화두일 수도 있겠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길을 걷고 있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했다. DMZ에 평화의 올레(순례길)을 만들고 싶다는 꿈에 대해서는 까미노 순례 이전 몽블랑과 돌로미테 트레킹 때부터 내가 하는 대화의 주메뉴였다.
대화의 말미에는 항상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기도하겠다, 나도 네가 만든 그 길을 걸으러 가겠다 하는 반응들이 따라온다.

 

 

자글거리는-태양-아래에서-오늘도-걷는다_resize.jpg

자글거리는 태양 아래 오늘도 걷는다

 


육체적 고통이라고 하면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지만 뙤약볕 아래에서 30킬로미터 넘게 걷는 것이 즐겁다고 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넘쳐나고 각자 마음에 품은 기도를 위해 또는 야물게 품고 왔던 기대와 희망를 버리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탈리아 출신 마우로(아르헨티나 출신 마우로와 다른 마우로이다)와 나누었던 이틀 전 대화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누구보다 열렬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겠다고 한 친구인데 사단은 그가 꺼낸 예수의 수의라고 알려진 천 조각의 진위를 소위 과학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논란 때문이다. 듣다가 이번엔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이냐고, 수의의 진위가 종교적 믿음에 영향을 주느냐고…. 순간 썰렁해지며 자리가 어영부영하다가 마무리되었다.

세상사가 명명(命名)하기와 경계 획정(劃定)이 대부분이라 생각하는 나로선 이런 허무한 상황을 뭐라 해야 할지 난감하다. 오십이 넘어도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해 보인다.
날씨 예보가 오늘부터 나흘 내리 37-8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더니 점심 무렵부터는 땀이 줄줄 흐른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시작하여 삼십킬로 넘게 걸어서 당도한 마을에서 한글로 비빔밥 된장국이라 써놓은 알베르게 입간판을 만나고서 반갑기 그지없다.

 

 

프렌치-루트에-한국인-주인장이-있는-알베르게-입간판_resize.jpg

오리온 알베르게 입간판, 프렌치 루트에 유일한 한국 안주인이 운영하는 숙소

 

 

2019. 7. 22.

오늘의 사족 1. 오리온 알베르게 문 앞에 당도하니 오늘 닫는다고 친절하게 한글로 써 붙여 놓았다. 이런 정도로는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썼지만 아쉽기는 하다. 2. 두 번째 찾아간 알베르게는 할아버지 주인장이 엄청 친절한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신다. 그래도 큰 문제 없다. 우리에겐 보디랭귀지와 웃음이 있다. 3. 오늘도 마무리는 차가운 맥주로

 

 

그늘을-찾아-차가운-맥주를-마신다_resize.jpg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차가운 맥주

 

 

Camino Day 13.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오늘 42+6 킬로미터를 걸었다.
까미노를 며칠 걸었다고 자만한 것이 폭망으로 이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걸으면 몸 상한다. 이제부터 계획이란 걸 좀 하면서 걸어보자.

 

 

저-멀리-구름이-나를-선동하였다_resize.jpg

저 멀리 구름이 나를 선동하였다

 

 

지평선과 맞닿은 평야는 우리나라에서는 김제나 가야 볼 수 있다. 오늘 까미노 여정 13일차. 오늘까지 걷는 동안 수도 없이 지평선을 향해 펼쳐진 밀밭을 보았다. 오늘 걸었던 높게 쌓은 제방길, 그사이 가득히 흐르는 물과 지평선 너머 아스라이 뻗어 있는 대지의 실핏줄과 같은 수로를 보며 풍요를 생각한다.
 

 

높게-쌓은-제방-그리고-순례길_resize.jpg

높게 쌓은 제방과 순례길

 

드-넓은-밀밭의-실핏줄과도-같은-수로_resize.jpg

드넓은 밀밭 사이사이 실핏줄과도 같은 수로

 

 

예보가 오늘 38도까지 오른다 했으니 그럴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더불어 바람도 같이 불어온다. 단지 바람이 나를 선동하였을 따름이다. 나는 그들의 선동에 혹하여 걸었을 뿐이다. 사단은 42킬로에 도착한 마을에 단 하나의 베드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노숙과 다음 마을을 고민하다 더 걷기로 하다.
 

 

모든-알베르게가-만석_resize.jpg

마을의 모든 알베르게가 만석이다. 하나 있는 호텔도 모두 예약 끝

 

 

다시 6킬로를 더 걸어 도착한 마을에서 마틴을 만났다. 흠~ 이 친구 나보다 더한걸~~ 옆에는 길동무인듯 아닌듯 금발의 미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
 

 

다시-6킬로미터를-더-걸었다_resize.jpg

오후 내리꽂히는 햇살 아래 다시 6킬로미터를 더 걸었다.

 

 

인생에 처음 48킬로미터를 걷는 노역(력)을 하였으니 취침시 소음을 낼 것이 분명하다. 베드가 아니라 방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기고 다음 마을 도착하자 처음 마주친 호스텔에 들어가 방을 달라 하였다. 아뿔싸, 여기도 꽉찼단다. 아차 싶어 살살 웃으며 근처에 방 좀 수배해 달라 청했다. 즉시 전화를 돌리더니 빈방을 찾아 준다. 무챠스 그라씨아스(Thank you very much)!

그리하여 찾아간 호스텔의 마지막 남은 방은 크다. 싱글베드 4개가 있는 방을 독차지하고 있자니, 진심으로 이런 낭비가 어디있나 싶다. ‘빈 베드 있어요’라고 나가서 광고하고픈 심정이다. 정말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

하여간 빨래해서 널고 찬물에 몸을 넣었다 나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시청 앞 넓은 광장에서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다.

 

 

46킬로미터를-걷고-마시는-맥주_resize.jpg

48킬로미터를 걷고 나서 마시는 맥주

 

 

어둑해진-시청앞-광장에서-맥주를-두캔-더-마셨다_resize.jpg

 

어둑해진 시청 앞 광장 벤치에 앉아 50센트짜리 가게 맥주를 두 캔 더 사와 마셨다. 저 광장 어디쯤인가 울리는 버스킹 연주를 들으며..


어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2019. 7. 23.

오늘의 사족 1. 오늘 쓴 단어 중에 ‘선동’은 당연히 나의 언어가 아니다. 송경동 시인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에서 빌려왔다. 송 시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내 안팎의 가식과 허위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비듬처럼 남루하게 떨어진다.

 

김영국-프로필이미지.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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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5부(18일- 23일) Camino Day 18. 도로 N-120 유감 오늘 22킬로미터 밖에 걷지 않았다. 말이 순례길이지 직선으로 뻗은 스페인 북부 국도 N-120 노선을 따라 차량 소음과 속도에 노출된 채 순례길이라 하기에 무색한 무성의한 길을 걸었...
    Date2020.01.28 Byadmin Views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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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4부(14일-17일)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4부(14일-17일) Camino Day 14. 평범한 일상의 중요함 어제 많이 걷기도 해서 오늘은 25킬로미터로 비교적 짧게 마치기로 작정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챙기고 어제저녁 캔맥주를 사서 마셨던 동네 광장으로 아침 먹으러 나갔다. 순...
    Date2019.12.29 Byadmin Views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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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3부(9일-13일)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3부(9일-13일) Camino Day 9. Sole vs. Soul 왼쪽이 늘 문제다. 허리도 왼쪽이 늘 시원찮고 그래서 걸을 때 뒤에서 잘 살펴보면 왼발 움직이는 모양새가 좀 다르다. 이번 순례에서도 5일 차부터 왼쪽 발에 먼저 신호가 왔다. 처음엔 대...
    Date2019.11.30 Byadmin Views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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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2부

    까미노 생각 없이 걷기 2부 Camino Day 4. 과유불급 옛말이 틀리지 않다 리카르도와의 조우 오늘 34킬로를 걸었다. 의도한 바는 없고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일상에서는 하루에 30킬로미터 이상을 걷는 일이 거의 없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 날을 기점으...
    Date2019.10.30 Byadmin Views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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