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에서 만난 젊은(young) 그대, 김영
길목인 32번째 인터뷰로 만나게 될 분은 김영 조합원입니다. 향린교회 소속 조합원들은 같은 이름의 김영 목사님을 떠올리기 쉬운데 다른 분입니다. 김영 조합원도 대학생 시절에 향린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는 얘기를 인터뷰 중에 들었습니다. 공감편지 길목을 쓰는 분으로 기억하는 조합원도 있고, 한학을 강의하는 국어교육과 교수로 기억하기도 하고, 시대적 현장에 소홀하지 않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기억하는 조합원도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얼굴을 마주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신도림역 부근 백화점에 있는 식당에서 냉면으로 저녁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장명숙 편집위원도 동석하여 대화를 시작합니다.
Q : 경북 의성이 고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A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성은 임진왜란 이후 선비들이 들어 와 살면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자락리에서 나고 자랐어요. ‘자락’(自樂)이라는 호를 즐겨 쓰고 있어요. 이 호는 고전에 나오는 ‘봄이 되면 산천초목에 꽃이 피고 풀이 자라 모두 스스로 즐긴다.’라는 말과 제가 자란 마을 ‘자락리’에서 따서 만들었어요. 선친은 마을에서 정미소를 운영했어요. 위로 형님이 두 분 있었는데 모두 이공계 분야의 공부를 했어요, 아무래도 집안 생계에 대한 책임감이 컸던 이유인 것 같아요. 저는 3남으로 형님들 덕분에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요.
Q :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그 시절 고등학교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A : 계성고등학교는 1906년 설립된 민족적인 기독교계 학교였어요. 박목월, 김동리 같은 분들이 졸업했고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식 건물과 교사들을 위한 연구실이 있었고 도서관 시설도 훌륭하여 우수한 교사들이 많았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대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며 유도도 가르쳤지요. 이런 학교 분위기에서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 읽기를 좋아하였고 진로도 자연스럽게 문과를 택하게 되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대학을 졸업하면 시골에서 국어 선생을 하면서 좋아하는 책이나 보며 살아야겠다는 꿈을 꾸었지요.
Q : 1970년대 초에 대학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절에 한국 현대사에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A : 책 읽기를 좋아하다 보니 도서관학과에 가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형님들의 반대로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어요. 대학 입학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독서 동아리에 가입한 일입니다. ‘자유교양회’라는 동아리인데 이곳에서 철학서적과 인문학 서적을 폭넓게 읽으며 의식의 폭이 넓어지고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이 시절에 접하게 되었어요. 그 이후로 함석헌 선생님의 강연을 많이 들으러 다녔지요. 1971년에 위수령이 발동됩니다. 학교 안에 군인들이 텐트를 치고 탱크가 들어오고 상주를 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고등학생 시절 박정희의 삼선개헌반대로 시위를 경험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당시의 대학상황은 더욱 심각했어요.
Q : 당시 대학생들의 상당한 저항과 의사표시 행동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 학교 안에는 진보적인 동아리들이 많았어요. 동아리들이 중심이 되어 교련반대 데모를 주도하는 등 다양하고 광범위한 저항 행동을 했어요. 그 결과 앞장섰던 학생회와 이념동아리 학생들이 잡혀가고 강제로 징집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독서모임 멤버들은 부당한 탄압에 저항하는 표시로 삭발을 했어요. 이후 민주화운동 학생들의 복학을 위해 학보와 그 외 서클회보 등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어요.
Q : 군대는 해병대를 지원해서 갔다고 들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A : 형제들이 대학을 다녀서 학비 부담이 되어 재학 중에 군대에 가려고 해병대를 자원해서 갔어요. 책에만 빠져 있는 모습과 현실과 비교하여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져서 좀 더 강하게 훈련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해병대에 자원하게 되었어요. 군에 가 있는 동안 ‘유신헌법’이 발표되고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어요. 만약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당시 상황으로 봐서 저에게도 뭔가 역할을 줘서 어려움에 부닥치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짐작을 해 봅니다.
Q : 대학생 시절에 향린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A : 맞아요. 그 무렵 향린교회에 나가며 비슷한 또래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며 문익환, 안병무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고 사회의식이 확장되었어요. 그 당시 기독교는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한국기독학생 총연맹’,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중심이 되어 연대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지요. 기독교계는 해외기독교 단체와 연대 덕분에 다른 사회단체들보다 비교적 보호막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민주화운동에 있어 향린교회, 수도교회, 경동교회, 새문안교회의 역할이 중요했어요.
Q :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배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 선친이 하시던 정미소를 접고 서울의 외삼촌과 철도 관련 부품공장을 운영하다 부도가 나게 됩니다. 관사에서도 쫓겨나고 거의 알거지 신세가 되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형님은 정찰기 조종사가 되어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월남전에 지원했어요. 형님에게 등록금 지원을 받아 낮에는 대학원에 나가고 밤에는 야간학교 교사를 했어요. 당시 상황에서 빨리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어요. 이 무렵 어떤 광고를 보게 되었고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한학자 장학생 모집, 월 10만 원 장학금’ 태동고전연구소의 학생 모집 광고였어요. 78년도였는데 월 10만 원은 큰돈이었어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장학금도 받으면 학비와 생활비를 한 번에 해결할 좋은 기회였어요. 그래서 바로 응시했어요.
Q : 물론 합격을 하였고 태동고전연구소 덕분에 한학에 관한 공부와 연구를 많이 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A : 공부는 5년 과정이었는데 1년 반 정도 다니다 도중에 그만두게 되었어요.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을 실감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졸업정원제로 인하여 대학생이 대폭 늘어났고 부족한 교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학위가 미비함에도 연세대에서 2개의 강의를 맡게 되었어요. 그리고 박사과정 3학기를 마칠 무렵에는 강원대학교에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제 나이 29세였어요.
Q : 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몇 번씩이나 말씀하셨는데 어떤 내용인지요?
A : 대학 시절 이후 함께 공부하고 활동한 후배들이 시국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럴수록 밖에 있는 저는 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커졌어요. 그래서 후배들 공판에도 열심히 가보고 영치금과 책들을 넣어주고 옥바라지를 했어요. 재판내용도 기록하고 각종 유인물을 보관하고 박노해의 글들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수집했어요. 옥고를 함께 치를 수는 없어도 부당한 탄압과 핍박의 기록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남겨야겠다는 일념으로 한 활동이었지요.
Q : 강원대학교에서는 교수로서 어떻게 민주화 활동을 계속했나요?
A : 87년 6.10민주화운동 시 “호헌 철폐”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며 학생, 직장인, 시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어났지요. 강원대학교 교수들과 학생들도 함께 일어났지요. 시국 선언문을 기초하고 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취 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한열이 세브란스에서 의식을 잃고 있을 때 치료비를 걷어 병원에 전달하기도 했어요. 이후 한겨레신문의 창간 운동과 전교조 해직 교사들에게 생활비 후원도 했었지요. 민족문학사연구소 기획실장, 대표직을 맡았는데, 이 연구소에서는 지금까지 학술지 민족문학사연구(최근 통권72호 발행)와 <<북한의 우리문학사 인식>><<민족문학사강좌>>를 비롯한 수십 권의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인하대로 옮기고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 후배 교수들과 ‘우리 시대를 생각하는 인하대 교수 모임’(우생모) 만들고 사범대학 학장과 교수회 의장도 맡게 되었어요. 그동안의 교육 연구 활동 중심에서 좀 더 공식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Q : 국문학을 전공하시고 한문학도 공부하셨는데 현재의 한글 전용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 일반 민주 시민의 각성을 위해서는 한글 전용이 필요합니다. 한문은 하나의 수단으로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과거의 학문을 꿰뚫어 현재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양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문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문 고전을 쉽게 풀어내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는 것은 지식인의 책임입니다.
Q :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우리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에 대하여 강조하는 글과 말을 여러 차례 하셨어요.
A : 노장의 생명사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자는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상선(上善)이라고 하면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듯이 만물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든 생명은 상호의존하며 공존하는 생명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인류는 한 동포이며 만물은 나의 이웃이라는 의식이 노장 사상이 우리 시대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Q : 출판한 책 중에 <<네티즌과 함께 가는 우언 산책>>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언의 뜻과 의미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A : 우언(寓言)이란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우언이란 말은 직언이 아니라 빗대어서 비유나 우화로 말하는 것이지요. 전란 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언으로 글쓰기를 한 장자사상의 핵심은 자유, 평등, 평화 사상입니다. 요즘 장자 공부에 푹 빠져 있습니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의 장자강연과 무의당 장일순 선생의 노자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북경대에서 도가철학을 스터디 한 경험이 있어 요즘 다시 장자 이야기를 강의하고 그 내용을 엮어서 책을 만들어보려고 궁리하고 있어요.
Q : 공동사회로 분류되었던 학교 중에 특히 대학이 갈수록 이익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위기에 처한 대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 점에서 자락서당의 운영이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A : 대학은 큰 배움을 얻는 곳입니다. 자기성찰과 미래에 대해 꿈을 꾸고 상상력을 키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취직을 위한 기능과 지식을 습득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어요. 자기 이익추구에 소용되는 소지(小知 : 작은 지혜)를 버려야 함께 어울려 사는 데 필요한 대지(大知 :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장자의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배움이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만드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자락서당‘을 열어 논어, 맹자 등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인격 수양이 모토였습니다. 인하대 제자들, 교육대학원 제자들, 인천 지역 중등교육연수원생들과 가족들이 토요일마다 모여 학습도 하고 여행도 같이 다니곤 했지요. 이제 나이가 들고 여유도 생겼으니, 다시 10명 내외 모여 ‘장자’를 공부하는 모임을 열어볼까 합니다.
Q :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앞으로 맞게 될 새로운 일상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A : 신자유주의 질서와 경제적 양극화, 자연 약탈을 통한 발전지상주의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끝은 결론부터 말하면 서로 돕고 사는 공공성과 생태, 농업의 중요성이 커지는 사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는 부가 나뉘어서 상호협동 상생하는 조합형태로 나누어지는 사회적 경제적 네트웍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은 선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필요합니다. 환경생태를 바꿔 에너지 소비도 줄여야 하고 욕망을 줄여서 적정수준의 소비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스템이 활성화된다면 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고 놀이문화와 예술 활동도 늘릴 수 있어요.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변화를 예상해요.
Q : 정년퇴직 이후에도 부지런히 바쁘게 활동하며 살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과 사진들이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A : 촛불혁명으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원하던 정부가 수립된 지 3년이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사회와 경제구조가 바라던 모습으로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세월호 진상 규명과 검찰개혁의 지지부진, 언론의 구시대적 행태와 대기업과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 등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계속 촛불을 들었던 마음으로 뜻있는 시민, 페친들과 연대해서 행동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인터뷰에서 언급하지 못한 김영 조합원의 다양한 활동과 생각은 한겨레신문(2018.11.27.) ‘김영 교수가 거리에 나선 이유’ 기사를 보면 덧붙여 읽어볼 수 있습니다. (https: // www.hani.co.kr /arti /well /people /940732 .html) 이번 인터뷰 덕분에 김영 조합원의 책 ‘함께 가는 길’을 선물로 받아 읽어봤습니다. 연구 생활을 하면서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쓴 글 중에 시의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책머리에 ‘중용에서 널리 배우고, 깊게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따진 다음에 이것을 돈독하게 실천하라.’는 문구가 마음에 남습니다. 책의 일부 내용은 인터뷰 내용 중에 몇 차례 인용했습니다. 교수 시절 학교 총동창회에서 ‘참스승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2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며 ‘스승 같은 좋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소통하니 기분이 참 좋다.’ 그 느낌으로 인터뷰의 마침표를 찍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