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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아카데미쿠스, 피경원 조합원

posted Nov 0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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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아카데미쿠스, 피경원 조합원

 

 

피경원 조합원은 길목의 실행위원으로서 다양한 교양 강좌를 진행해 왔습니다. 향린교회에서는 안병무 읽기 모임을 결성해 이끌어왔고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27년 째 근무하고 있는 성실한 직장인이기도 합니다. 칼퇴근을 한 피경원 조합원을 여의도 증권가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 주로 길목과 신앙, 학문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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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동안 실행위원으로서 다양한 일을 맡아서 했는데,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에 관한 강의도 했죠?

 

네, 그동안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주로 교양 강좌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길목의 정관을 살펴본다든지, 길목의 사업 모델에 관해 알아보았고, 노동가치설을 강연해서 <길목인>에 올리기도 했죠.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에 관한 시리즈 강의를 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도서 강독을 했는데요. <산타와 그 적들>이란 책을 통독한 후 함께 의견을 나눴는데 의미 있고 재미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강연 기획을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진행하다보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서 아쉬움이 많죠. 

 

2. 길목 창립에 관여하셨고, 또 처음부터 실행위원을 맡아 최장수 위원입니다. 길목 운영에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뭔가요?

 

길목의 사업이 의미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강연이나 기행 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비교적 손해를 안보고 진행했다면, 공개강좌나 심심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하면서 후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모름지기 어느 정도 재정 자립성을 갖고 있어야 운영이 될텐데 언제까지 향린교회의 선교비 형식으로 지원을 받아야 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살림이 빌딩의 임대료 수입이 길목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데 이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수익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고민입니다. 조합원들과 함께 사회적 경제에 관해 공부한 것도 그런 고민의 일환이었죠. 

   

3. 길목의 프로그램 중 대표적인 것이 다크 투어리즘인데요. 기행에 참여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베트남 기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전에 길목 기행이 국내에서 일어난,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살상이나 학살과 관련된 기행이었다면, 베트남 기행에서는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한 현장을 탐방했죠. 그 현장들을 돌아보면서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20대 청년들이 파병을 갔죠. 저희 아버지가 60년대에 군대 생활을 하셨는데요. 만일 당시 우리 아버지도 베트남에 파병을 가셨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베트남에선 젊은 남자들은 베트콩으로 밀림에 숨어들었고 마을엔 주로 여자들과 아이들이 남아 학살을 당했죠.  

그 추모비를 많이 봤는데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쓰여 있더군요. 대부분 1967년이나 1968년생 아이들의 묘비가 많이 있었는데, 그걸 보니까 그들이 현재 살아 있다면 지금의 제 아내와 비슷한 연배겠구나... 생각하니 참 서글퍼지더군요. 우리나라 군인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을 느꼈습니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가졌는데요. 비록 생존했지만 당시 입었던 내상과 외상을 아직까지 고스란히 갖고 있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책으로 읽었던 것과 매우 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50여 년 전 지구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게 마치 지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한 현장감을 느꼈습니다.

당시 베트남 다낭에 한국군이 주둔해서 집중적으로 학살이 벌어졌었죠. 그 학살 포인트들이 다낭 주변에 여러 곳이 있는데요. 그런데 현재 공교롭게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여행을 가는 도시가 다낭입니다. 그 도시에 한국 자본이 많이 들어가 리조트 개발을 해서 태반이 한국인들입니다. 우리가 거의 베트남 경제를 좌우할 만큼 한국의 영향이 커졌죠. 

그런 사실들을 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들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경제 성장을 하고 지금의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미국의 용병으로 가서 미군의 총알받이를 했다는 것, 박정희의 정책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을 그곳에 보내 외화벌이를 해서 그 종잣돈이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 그 모든 역사적 사실 앞에 마음이 착잡해지고 무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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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실행위원으로서 앞으로 길목에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프로그램이나 사업이 있나요?

 

사회 현황과 이슈로 재미있는 강연을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최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는데요. 전 이 드라마에서 ‘욕망 이론’에 주목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여러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저는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봤습니다(실제로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프론트맨’의 고시원 책상에 자크 라캉의 책 <욕망 이론>이 놓여있는 장면이 있다). 

실제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이 게임이 벌어지는 상상계 속 거울 속에 놓인 자신을 보는 것, 그런 많은 상징들이 드라마 안에 들어가 있는데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강연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이론이 그다지 재미가 없어서 <오징어 게임>과 라깡의 욕망 이론을 연결시켜서 쉽고 재미있게 해석해 줄 분을 찾고 있습니다.

 

6. 향린교회를 24년 째 출석하고 있는데요. 향린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고,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원래 대학교 다닐 때부터 향린을 알고 있었고 행사 때문에 가끔 찾아왔었죠. 당시 대학생일 때는 예장합동인 ‘사랑의 교회’를 다녔는데요. 당시 다른 교파의 교회들을 접해보긴 했지만 교회를 옮기겠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아이도 옥한흠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거든요. 그러다 이사를 강북으로 하면서 강남에 있는 교회를 다니기가 거리상 불편했습니다. 그 당시엔 4호선 구역에 있는 교회를 다녀보자 하고 교회를 물색하면서 가족과 함께 직접 교회 순례를 했죠. 그러다 향린교회가 4호선 명동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오게 됐죠. 그 무렵, 사순절 때 와서 홍근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타 종교의 구원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몇 주만 다녀보자 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계속 다니게 됐죠.

 

7. 당시 향린교회의 특성이 낯설지는 않았나요?

 

대학교 다닐 때 복음주의권 학생운동을 했는데요. 그때 민중신학을 공부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엔 힘들었는데, 해방신학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남미 해방신학이 스펙트럼이 넓어서, 해방신학 우파 쪽에서 사회변혁 운동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했죠. 

서클 선배들이 잡지를 만들 때 김진홍 목사, 손봉호 교수, 이만열 교수 등 복음주의 학생 운동권에서 그분들을 배경으로 신문, 잡지 등을 만들었는데요. <복음과 상황>이란 잡지가 있었는데 지금도 발행하고 있습니다. <성서한국>도 성경적 토지 정의를 주장하는데요. 매우 급진적인 주장 예컨대, 토지공개념 등을 주장하죠. 그곳도 개신교 운동권이라서, 향린에 와서 신학적 배경이 달랐고, 반미와 민족주의 외치는 홍목사님과 입장이 많이 달랐지만 비교적 자연스럽게 적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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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람이 모이는 어느 공동체나 크고 작은 부침을 겪죠. 향린교회도 그런 부침의 역사를 겪어왔는데요. 그런데 교회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도 피경원 씨는 비교적 덤덤해 보였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죠. 그런 모습이 좀 인상적이었어요.

 

여러 공동체 안에서 분열하는 것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이 사랑의 교회를 다니는 것이 이율배반적이었는데요. 생각이 달랐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기본적으로 오픈 마인드 훈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안 맞아도 치열하게 토론하면 이해되니까요. 서로 신앙의 토대 위에 있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갈등을 겪어도 너그럽게 보려고 하는 훈련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된 것은 제가 인간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고, 사랑의 교회를 다닐 때는 교인들끼리 공동생활도 해봤는데요. 그러면서 공동체 생활에 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타인과 함께 생활하면 부딪히는 일이 많았는데 그러면서 인간에 대해 큰 기대를 안 하게 됐습니다.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니까요. 

 

9. 향린교회에서 오랫동안 안병무 민중신학 모임을 이끌어왔는데요. 어떻게 모임을 결성하게 됐나요?

 

사실 그분을 잘 알아서 그랬던 건 아니고요. 아내가 예향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교회에 일찍 오니까 저도 같이 와서 아이를 보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커서 제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니까 좀 심심해지더라고요. 사실 안병무 선생에 대해서는 학교 다닐 때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잘 이해가 안됐어요. 그땐 민중신학이 확고하게 이단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향린에 와서 다시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을 접하고, 교역자 분들이 지지해주시고 홍영진 장로님도 지지해주시고 해서 안병무 읽기 모임을 만들었죠. 초기엔 정원진 목사님과 황성규 목사님이 지도해주셔서 안병무 텍스트를 다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됐죠. 저는 이전까지 불트만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안병무는 민중(오클로스)을 만났죠. 그래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달라졌죠. 

 

10. 확고하게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학문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더구나 시각이 달라진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인데요. 그래,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 속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무기력한 인간처럼 묘사돼 있죠. 베드로처럼 신앙에 자신감을 보이던 사람도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까. 자신의 신앙에 자신 있어 하던 사람도 작은 일에 쉽게 쓰러집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죠.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하지 않고 함께 있어 주면서 위로합니다. 구원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인간은 다 약하다.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역설 같은 것이죠. 그 안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예수를 만나서 자기 처지에서 최선의 행동을 합니다. 민중 사건에 그런 게 나타나죠. 자기 초월성 같은 것.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매우 이타적인 행동, 서로 연대하는 모습들에서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기존의 공식들이나 구조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게 안병무가 발견한 구원의 순간이죠. 안병무 모임을 하면서 그걸 배웠습니다. 안병무 읽기 모임은 제 인생의 큰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이전에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스스로 공부해서 깨우친 것이니까요. ‘그런데 넌 민중을 위해 뭘 하고 있어’라는 질문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죠. 

 

11. 광화문 시대에 향린이 나아갈 방향은 어때야 할까요?

 

향린이 지금까지 했던 일들, 벌려놓은 일들을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어딘가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잡아서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갔으면 좋겠어요. 예컨대, 

가장 큰 이슈들, 환경 문제라든지 한반도 평화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12. 신용정보 회사에 다니죠? 일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재미가 하나도 없을 텐데... 듣고 싶으세요?(웃음) 

 

“아뇨. 사실 그다지...”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피경원 조합원은 매우 진지한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몸에 밴 독서와 공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삶과 신앙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인상적이었죠. 대개 인류의 특성을 ‘호모-’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 피경원 조합원을 보면서 얼마 전 한 TV다큐멘터리의 제목이었던 ‘호모 아카데미쿠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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