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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다음 길을 여는 관문 - 배미원 조합원

posted Dec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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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진희
발행호수 63

고난은 다음 길을 여는 관문

- 배미원 조합원

 

배미원 조합원은 1987년 9월부터 사회복지사, 여성정책, 사회적경제정책 연구 활동을 하다가 올해 6월에 퇴직했습니다. 그가 36년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이룬 발자취에 대해 들었습니다. 성차별적이고 양극화된 세상을 접하며 성평등, 기회의 평등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사회적경제를 연구하며 공동체적 삶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오랜 직장생활에서의 숨가빴던 긴장 상태, 녹녹지 않았던 가정생활, 잦은 입원과 만성질환은 퇴직과 함께 범불안 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에요. 퇴직 선물이 범불안 장애라는 현실이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하나님은 고난이 있을 때는 항상 다음 길을 열어주셨어요.”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그간의 삶을 돌아보며 성서 읽기와 가족들과의 관계에 마음을 쏟는 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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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독교인이시고 향린교회 교인이시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집 앞에 있는 교회에서 성장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어요. 그 후에 대형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직업상 교회 소속 복지법인 이사 활동을 했어요. 교회의 사회복지법인은 일반 사회복지법인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실망했어요. 예수님의 삶과는 달리 사치스러운 교회, 목사님들이 우상화돼 가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그래서 향린교회로 오시게 되었나요?

 

세월호 때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침몰시킨 게 아니에요. 나라가 침몰하려 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아이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라는 발언을 듣고 혼란이 왔어요. 거기에다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타난 태극기 부대를 보며 나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평소 향린교회 사회선교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세월호 집회에 가서 본 ‘청년 예수’ 깃발에 매료되었어요. 그리고 평신도교회라는 것이 굉장히 의미가 있었고, 지향점이 있는 신앙 공동체라고 하는 점이 좋았어요.

 

Q: 사회복지사로서 여성정책과 사회적경제 정책을 연구하는 일을 해오셨지요? 그 일을 선택하신 까닭이 있나요?

 

고등학교 때, 선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게 예수님 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저는 전공을 사회복지로 선택하게 된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Q: 전공 공부가 즐거우셨겠네요?

 

전공도 너무 재밌었지만, 대학 생활이 되게 재미있었어요. 대학 때 미팅을 100번 했거든요. 모든 것이 재밌었어요. 그때 친구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놀다가 대학원을 가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경희대 정신과 폐쇄 병동에서 꼬박 2년 동안 인턴 과정을 했어요. 실습도 거기서 하고, 레지던트들이 사례를 내놓으면 그 사례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는 콘퍼런스도 타 대학원생인 저에게 허락해주셨어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정신보건 사회복지사가 없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는 그곳의 특별한 배려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죠.

 

배미원 조합원은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에서 일을 시작하여 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구임대 아파트 종합사회복지관인 B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초이다 보니 빈곤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계기가 되었고, 직원들끼리 마음이 잘 맞아서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Q: 우리나라 최초의 영구임대 아파트 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당시가 1990년이었는데, 그 지역은 하루가 멀다고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겨울에는 양말 신은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부모들이 방치한 아이들이 밥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우던 곳이었어요. 우리 복지사들은 프로그램과는 상관없이 아이들 집으로 가서 청소도 해주고 밥도 해주었어요, 저는 작업장 일을 맡았었는데 그분들한테 근로 동기도 부여하고 의욕도 유지하게 하려면 작업장에 일거리가 끊기지 않아야 하거든요. 일거리를 찾아오기 위해서, 당시 봉제공장이 많았던 창동으로, 쌍문동으로, 창신동으로 다니면서 일거리 찾아오고 했어요.

 

Q: 그곳에서 파면을 당하셨다고요?

 

그런데 그 복지관이 아이들 간식비를 빼돌리고, 이중장부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MBC, KBS 기자를 만나 인터뷰도 하고, 우리 월급으로 자금을 마련해서 여기저기 호소문 보내는 활동을 벌였어요. 그때 그 사람들과는 지금까지 아주 친한 동역자들처럼 만나요. 서로 힘주고 같이 기도하고, 그게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그 사건으로 구청이 발칵 뒤집혔죠. 우리를 조사하던 담당 검사와 형사들이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고는 복지관에서 가지고 온 서류를 다 주면서 정리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장부 보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돈이 어떻게 잘못 흘러갔는지를 밝혀내고, 개선점을 찾아냈어요, 그 사건으로 급식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때 제가 주동자로 몰려서 회유와 협박에 엄청나게 시달리다가 결국 파면을 당했어요.

 

Q: 사회복지단체가 정의롭지 못하게 운영되기도 하네요?

 

사회복지의 뿌리가 아주 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어요. 어쩌면 사회복지에 대한 더 깊은 애정이 생기기도 했어요. 왜 사회복지가 이렇게 왜곡됐을까 생각해보니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들이 미국 것 베껴서 가르치니까 사회복지의 진짜 정신을 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미원 조합원은 그 일을 겪은 뒤 사회복지계와 거리를 두고 싶어서 학습지 교사를 시작했습니다. 사람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이고, 아이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영업(?)이 잘되어 일주일에 100시간을 넘게 수업을 하고, 전국 TOP 10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합니다.

 

Q: 학습지 교사 활동도 사회복지 일의 성격이 있었나요?

 

학습지 교사는 가정을 방문하는 일이잖아요.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진짜 상담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상담이 이론도 중요하지만 정말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고, 그 삶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이 일을 한 일 년 하다 보니 사람들의 진짜 삶을 알게 됐어요.

 

Q: 그 후 다시 사회복지 활동을 하셨지요?

 

저는 일하면서 ‘처음’, ‘최초’ 이런 경험이 참 많았어요. 이상하게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프로그램을 주로 맡게 되더군요. 1980년도에는 정신장애인을 기도원이나 수용 시설에 보냈어요. 태화에서는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재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샘솟는 집’을 만들었어요. 처음 태화 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당시에는 이 일을 세팅하는 작업부터 배우면서 일했어요. 그다음 직장인 종합사회복지관도 최초의 영구임대 아파트 종합사회복지관이었어요.

 

그다음에 일한 경기도청소년상담복지센터도 상담자가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는 첫 세대였어요. 96년도에 자퇴 청소년 전수 조사를 면접으로 진행하는 일을 처음 시도했는데. 집집이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을 봤어요. 그들은 이미 엄마나 며느리가 돼 있고 성매매 여성이 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꿈은 다시 학교로 가는 것이었어요. 그들을 데리고 합숙캠프를 하며 “우리 다 같이 학교로 돌아가자”라고 다짐하면서 오히려 제가 달라졌어요. 교육청은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사업을 우리가 해내니까 너무 놀랐지요. 처음에는 시범 사업으로 했던 것이 전국 사업이 되고 지금은 제도화가 되었어요. 학교 밖 청소년 사업의 시초인 셈이지요.

 

사회복지계에서는 여성들은 기획력이 없어서 오래 일을 못 하는데, 그 까닭은 여성들이 이슈나 명제를 가지고 기획을 하는 자리까지 잘 못 올라가기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미원 조합원은 그런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경기도 여성능력개발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 기관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안타까운 일화가 있어요. 95년에 ‘경기 여자기술원’이라고 성매매여성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도망 방지를 위해 밖에서 문을 잠근 거예요. 이 여성들이 탈출할 목적으로 불을 냈는데 5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이 일이 있고 나서 여성계에서 그곳을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시키자 해서 전국 최초의 여성 직업 훈련 기관으로 세운 곳이에요. 경력단절 여성에게 고부가가치 직업 교육으로 컴퓨터 과목을 가르쳤어요. 그곳에서 저는 처음에는 자립 지원팀장을 맡아 가정폭력과 집에서 쫓겨나도 갈 곳 없는 저소득층 한부모가정을 위한 모자 자립 시설을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Q: 여성으로서, 행정공무원이 아닌 전문계약직 공무원으로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그 기관은 경력단절 여성의 직업 훈련이 중요한 사업인데 관료직인 공무원들이 그 목적을 이해를 못 하니 제가 직업 훈련 팀장을 맡았어요. 그러자 행정직 남성 공무원들이 “전문계약직이 팀장을 하는 건 아니다. 이 일은 남성 행정직이 해야 하는 자리다”라고 하며 항의와 압력을 넣는 등 별 무서운 일을 겪었어요. 저는 평소에는 유해 보이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 독해지거든요. “난 그럴 생각 없다”라고 그 자리를 지켜냈어요. 여성의 경제활동을 위한 공공 정책은 여성이 맡는 편이 일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그 일이 나중에 ‘유엔 여성 지위위원회’에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재취업 성공사례’로 소개가 되었어요.

 

Q: 그렇게 용기가 있게 일하게 한 그 힘은 어디에서 왔나요?

 

제 가정생활과 일이 항상 연결됐어요. 제가 혹독한 시집살이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는데요, 그래서 성평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성차별에 대해서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아요.

 

Q: 그런 활동 사례를 더 소개해주세요.

 

전국 광역 지자체에 여성비전센터라고 있는데, 거기에 전문 직업상담사를 배치하는 일을 시도했어요. 여성들이 취업하고 안정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일자리만 연결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통합 서비스가 필요하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원스톱 서비스라는 표현을 썼는데,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공공기관이 맡아야 하겠더라고요. 그러려면 전문가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전문 교육 과정을 만들고 경기대와 협력해서 직업상담사를 양성해서 지금은 전국 여성비전센터에 직업상담사가 다 배치가 됐어요.

 

Q: 사람들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기 위해 배미원 조합원이 공공기관에서 노력을 많이 하셨네요?

 

그 당시에 제가 기획한 것들이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IMF 사태도 한몫했어요. 당시 일정 소득 이하의 실업자들한테는 국가가 일자리를 줬어요. 공공근로라고 하는데, IMF 사태 이후에 여성도 공공근로의 대상이 되었어요. 그래서 여성 공공 근로를 활용해서 경기도 안에 있는 여성과 관련된 일자리나 여성 기업인과 그들이 하는 일과, 경기도 안에 있는 어린이집을 전수 조사를 해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어요. 여성이 사회에 재진입을 위해서는 여성들에게 특화된 정보가 필요하잖아요? 여성의 직업 교육과 여성 기업인들의 연대를 돕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제가 책임을 맡게 된 거예요. 나중에 여성부가 그 사업을 받아 가서 전국으로 확대했어요. 직접 방문하고 조사하는데 연인원 5,500명을 동원했더라고요.

 

Q: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경제에 관한 활동을 하셨지요?

 

제가 박사논문을 ‘생애 주기와 빈곤이 노동 이동에 미치는 영향’으로 썼어요. 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업만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욕구를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도 그게 경제활동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론은 사회적 경제가 하나의 대안이지요. 제가 경기복지재단에서 사회적 경제 담당 책임연구원으로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도 없어서 ‘사회적 기업’이라고 했어요. 그곳에서 제가 좀 더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죠. 그리고 사회적 경제를 공부하면서 사회복지가 굉장히 자본 중심적이라는 것에 회의감이 들면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Q: 가정생활과 일이 항상 연결됐다고 하셨는데, 학교 협동조합을 만든 것도 그런 경험에서 출발한 것인가요?

 

네. 제 아들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 난 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어요. 저는 부적응아라도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학교는 교사의 권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데, 아이들도 똑같이 자기 권리를 확대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우리나라의 학교가 획일적인 지식공장 같고, 애들은 차별받는 그런 상황이 고민이 되었어요. 그래서 다른 나라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었는데, 외국에는 ‘학교 협동조합’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2012년 당시 영국의 폴린그린이라는 분이 국제협동조합연맹(ICA) 최초의 여성회장이었어요. 그분도 협동조합을 시작한 게 당신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걸 보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학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학교 협동조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Q: 처음 학교 협동조합을 만들 때 힘들지 않았나요?

 

2012년 학교 협동조합을 준비할 때 우리나라에 선행 자료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료 하나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지만, 제 생각에 동의해주시고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거 같았어요. ‘협동조합은 2명의 동지가 모여 그 일에 미쳐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절절이 느껴졌어요. 학교협동조합이 제도화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자료를 다 공유했었어요.

 

학교 협동조합은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조합원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미성년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없어서 우선 법적 제약을 풀어야 했다고 합니다. 초중고 협동조합은 매점을 운영하는데, 매점이 학교나 외부 자본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던 것을 생협에 납품하는 회사와 직접 연결해서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자 이상하게 정치와 결부되면서 지금은 관심이 많이 식은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교육부 안에 학교 협동조합 전담 부서가 생기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Q: 경기도에서 사회적 기업 관련한 사례 있나요?

 

성남시에서 2011년부터 근무하다 2015년부터는 성남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섬겼어요. 민선 6기 공약으로 시작된 시민기업이 운영되고 있었어요. 시민이 주주가 되어 운영하는 기업으로 기획이 된 것인데 업종 중에 생활폐기물 처리기업을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는 사업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사업기획과 제도화는 일반적인 행정절차이기는 하지만 콘텐츠가 탄탄하지 않으면 제도 이식이 안되거든요. 그래서 그 일을 시작했어요. 이미 시작된 사업이라 관심이 옅어졌지만 저는 공공기관과 영리기업의 협치를 통해 시민의 세금이 지역사회안에서 선순환되고 지역사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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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사회적경제 발전을 위해 일한 공로로 공로패를 받았다.

 

 

Q: 그러면 과정에서 마찰이 기존에 하던 사람들과 마찰은 없었니요?

 

사람들이 사회적 기업이 좋은 거라고 알아버렸기 때문에 반대를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공공이 나서서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열 수 있는’ 이 시민 기업 사례를 가지고 국가공무원연수원, 법무부, 행정부, 전국 지자체에서 사례 발표를 많이 했어요.

 

Q: 그러면 배미원 조합원이 생각하는 ‘공동체’는 서로 잘 살 수 있는 상생의 사회이네요.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고, 상생과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이지요.

 

Q: 광주 여성가족재단을 끝으로 퇴직을 하셨지요?

 

광주에서 활동하는 중에 우리 아들이 우울증세를 보였어요.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중에도 수학분야에서 천재성을 보여 우수한 대학에 입학하고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아들이 제게 그동안 너무 외로웠다고, 죽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일하면서 열심히 양육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아픔이 더 커서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지방 텃새도 만만치 않은 데다 ‘번아웃 증후군’이라며 무조건 쉬라는 진단을 받고 퇴직을 하고 아들 곁에 있기로 했어요.

 

Q: 일하는 여성으로서 어려움이 많으셨군요?

 

저는 신혼이 대가족에서 시작되었고 20년 정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도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남편에 대한 원망이 많았어요. 어쩌면 회사에 가면 인정을 많이 받기 때문에 더 일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Q: 생각을 정리하려고 예수원에서 일주일을 보내셨군요?

 

예수원에서 제 마음에 확 와닿은 묵상 주제가 ‘제사를 드리기 전에 화해하라’였어요. 묵상하고 그곳에서 만난 분들과 이야기하고, 기도하면서 위로를 받고 제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꼈어요. 마지막 날 제가 하나님께 고백을 하면 예수원 신부님께서 저의 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셨음을 증인이 되어주시는 의식이 있었어요. 저는 결혼생활에서 그동안 힘들었던 제 마음을 고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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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부님께서 답을 주시던가요?

 

“하나님은 그동안 그 많은 것을 견디며 감당해 온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당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신다. 당신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거듭나는 걸 원하시지 죄책감 속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에 정말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지고, 돌아보니 제 삶에서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Q: 예수원에서 돌아온 뒤 변화가 있나요?

 

집에 와서 남편에게 편지를 썼어요. 남편에게는 신부님께 이야기한 것들과 우리 부부가 우리 애들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자는 말이 막 편지로 써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동안은 공감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그 편지를 읽고 울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게 미안하다고 말하더라고요. 이제 우리 가정에 화해의 강물이 흐르는 것 같고, 우리 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어 우리 가정이 다시 설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돌아보니 저는 여태까지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그다음 길을 열어주셨어요. 고난이 끝이 아니라 다음 길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혼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배미원 조합원은 요즈음 성서 말씀이 그렇게 다디달다고 하네요. 성서를 읽으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며 한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고 해요 “가롯 유다가 회계일을 맡았잖아요. 비영리 단체(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의 회계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짐작이 가는 거예요.”

 

사회복지기관에서 평생을 일한 사람이 아니면 생각하지 못할 이 말에 저는 그만 빵 터지며 감탄했습니다. 배미원 조합원이 번아웃 상태에서 회복이 되고 길목에서도 그 유능한 재능을 맘껏 펼치는 날이 오리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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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단문 선답]

 

1. 나에게 믿음(신앙)이란?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필요충분조건, 내 안에 믿음 있다~

 

2. 나에게 행복이란?

우리 가족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하는 거

 

3. 나에게 사랑이란?

미루지 않고 실천하는 좋은 마음

 

4. 나에게 나이 듦이란?

숙성된 인생의 맛을 아는 기쁨

 

5. 나에게 잘 산다는 것은?

늘 동행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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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2.05.03 Views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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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자신과 친해지고, 사랑하고, 신뢰하자 - 김유하 조합원

    김유하 조합원 - 자신과 친해지고, 사랑하고, 신뢰하자 코로나 19는 사회집단과 개인생활에 우울감과 무기력 증세도 함께 감염시켰다는 말이 들려온다. 얼마 전 대통령 선거 이후론 심리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들도 한다. 이렇듯 사회와 개인은 늘 긴장과 문...
    Date2022.04.05 Views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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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내가 먼저 행복해야 남들도 행복하게 - 김지아 조합원

    내가 먼저 행복해야 남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김지아 조합원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가끔은 까닭 없이 우울해하고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며, 닥치지도 않은 일로 걱정을 사서 한다. 특히 개인보다 공동체를 더 ...
    Date2022.03.01 Views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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