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0도’, 공감편지 작가 - 박혜영
‘공감편지길목’에 <박혜영의 금요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번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박혜영 조합원을 광화문에서 만났습니다. 맛난 점심을 같이 먹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시며 마침 금요일이라 그날 보내신 공감편지 길목 이야기며, 박혜영 조합원이 쓴 책 <느낌의 0도-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을 살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쓰는 공감편지
Q : 선생님은 혹시 기독교인이신가요? 어떻게 길목회원이 되셨나요?
A : 홍영진 이사장님과 인하대학교 교수모임을 함께 했어요. 홍이사장님 권유로 길목에 가입하게 되고 공감편지 길목에 글을 쓰게 되었어요.
Q : (역시~~! ‘공감편지 길목’에 포진하고 계신 필자분들이나 ‘길목인’ 곳곳에 홍이사장님의 길목사랑과 포섭능력?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
길목을 만난 소감이 궁금하네요?
A : 처음에는 길목 공감편지나 길목인 웹진이 향린교회 소식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교회 소식지라고 하기에는 보편적인 관심사를 다루고 있고, 수준도 높아서 기대이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향린교회에 처음 가보고 좀 놀랐어요. 유명한 교회라고 들어서 예배당이 크고 멋질 거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교회건물에 내 걸린 현수막도 예상 밖이었고요. 길목협동조합은 다른 삶을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Q : 공감편지는 언제부터 시작을 하셨는지, 특별히 어떤 내용을 쓰겠다는 방향이나 주제가 있나요?
A : 제가 공감편지를 작년부터 일 년 정도 쓰고 있는데요, 크게 보자면 생태에 관한 이야기들, 작게 보자면 제가 사는 처지를 달래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Q : 아~ 삶을 달래보려고요?
A : 마음으로 생각하는 좋은 삶과 실제 저 자신의 삶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요. 그 간극을 메꾸고 싶은데, 혼자서는 잘 안돼요.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이나 성과지향적인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용기가 없지만 그것에 맞추어 살 수도 없어요. 그래서 처음 공감편지를 시작할 때는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한테 내 고민거리를 전달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글이라는 것이 자기가 먼저 절감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거든요. ‘남을 살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다. 내 마음의 괴로움을 글로 만들어냄으로서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러면 그것이 다시 나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Q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요?
A :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생태적으로 좋은 삶을 말해요. 왜냐하면 지금처럼 살면 지구온난화가 심해질 거고, 동식물은 다 사라질 거고, 인간관계도 황폐해질 거고,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면서 자연은 더 멀어지게 될 거에요. 그런데 이런저런 글을 쓰지만 그 문제를 풀기에는 제 역량이 안 되고, 무시하고 살기에는 마음이 답답해요.
Q : 그렇지요. 혼자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A : 그런데 ‘왜 사람들이 생태적으로 좋은 삶을 살지 못하나?’ 생각해 보았어요. 그 이유가 시간 때문인 것 같아요. 물리적, 심리적 시간이 없는 것이에요. 우리 사회분위기가 사람들이 자기자리에서 마음 편하게 정주하면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아요. 각자가 모두 전력을 다해 더 나은 학교, 더 나은 위치로 올라가도록 사회가 부추기기 때문에 우리가 점점 더 바빠지는 것 같아요.
Q : 물리적, 심리적인 시간부족 때문에 생기는 다른 문제는 무엇일까요?
A :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도 시간이 원인이에요.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이예요. 아이를 자투리시간에 키울 수는 없잖아요.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육아휴직을 보장해 주어야 해요. 자영업자들의 경우는 더 힘들지요. 국가가 양육을 개인 간의 경쟁에 맡겨두니까 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당연히 안 낳는 쪽을 선택하게 되는 거예요. 출산율이 감소하는 다른 까닭은 여성들은 생태적 감수성이 뛰어나니까 여기가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 못 된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아이를 키우려면 안정된 장소가 필요한데 주거문제 역시 개인들의 경쟁에 맡겨두니까 자꾸 오르는 전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많은 젊은이들이 포기하는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는 자기 혼자 사는 것도 힘들거든요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 세상보다는 좋을 것이고, 좋은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잃어버린 어린 날의 바닷가를 대신해준 문학
Q : 열 살 무렵 부산의 변두리 바닷가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셨다면서요? 그 뒤 심경을 책에는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골목길과 무덤이 즐비하던 학교 뒷산과 비릿한 부둣가를 그리워하며 나는 점차 글에 의존하게 되었다. 아직도 서울 언저리를 떠돌고 있지만 그때 이후로 문학은 잃어버린 그날의 바닷가를 대신하여 내 마음 속에 해원(海原)이 되어주었다’ <느낌의 0도>
라고 쓰셨던데요, 그래서 문학을 전공 하게 되셨나요?
A : 고등학생 때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싶었지요. 문학이 좋지만 제 식견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외국문학을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어요.
Q : 선생님의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83학번이라면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시절인데 선생님도 학생운동을 하셨나요?
A : 대학 때 학회에 들어갔는데 겉으로는 정치경제 사상사 공부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학생운동을 하던 동아리였어요. 그때는 시위가 자주 있어서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렵던 시대였어요. 그런데 저는 가끔씩 그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해요.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탄압받던 그 때가 경제적 격차로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지금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때도 물론 부자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분담하며 살았어요. 물질적으로 궁핍했다는 것이 큰 고통이 아니었어요.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서로의 처지를 알고 지냈어요. 지금은 물질적 빈곤이 나아졌는데도 절망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잖아요. 일가족 자살 같은 기사를 대하면 우리사회가 이상하구나! 충분히 나눌 수 있는데, 서로 협동하면 안 죽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가족 자살 같은 뉴스를 독재정권 시절에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경제적 갈등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느낌의 0도―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
Q : 선생님이 쓰신 <느낌의 0도> 책에 대해 이야기 듣고 싶어요.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셨나요?
A : 저는 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가진 가장 놀랍고도 예외적인 특징 중 하나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언어를 배울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는 존재지요.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는 굉장한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죠. 인간은 언어를 통해 남을 이해할 수 있게 돼요. 그런데 언어를 가장 잘 연마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직관적으로 공감의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는 우리의 자양분이지요. 제가 여러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참 좋다!’고 생각했던 감동을 잘 풀어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Q : 이 책 제목 <느낌의 0도> 는 어떤 의미인가요?
A : ‘0 도’는 존재들이 무감각에서 깨어나 점차 눈을 뜨는 해빙의 온도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보고 듣고 느낄 자유가 있지만 우리의 감각은 한쪽으로만 고정되어 있어요. 대다수 사람들의 감각은 한줌도 안 되는 강자의 세계만 욕망하기에 약자의 세계는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를 갈망하면서 사회는 경쟁적이 되고 내면은 황폐해지며 이 지구는 인간만 생존 가능한 이상한 서식처가 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감각을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열어야 합니다. 감각이 깨어나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 그러면 비로소 보이지 않던 수면 아래도 보게 되고, 인간이란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자연과 사람이 결국 하나라는 지혜도 배우게 됩니다.
Q : 이 책의 부제는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이고, 이 책에는 여덟 명의 작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서문에서
‘나는 이 책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 20세기 작가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이끌고 우리사회를 더 평화로운 공간으로 만들며 나아가 아름다운 자연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생태적 관점에서 주요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싶었다.
라고 쓰셨어요. 여덟 명의 작가를 선정한 기준이 있나요?
A : 네. 이분들은 노벨상을 받은 것도, 문학적으로 최고로 인기 있던 작가들도 아니에요. 제 나름의 기준은 첫째, 자기 연민이나 자기 우월에서, 아니면 자기 위안이나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쓴 작가들, 그게 자연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제3세계 식민지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작가를 골랐어요.
그 다음 기준은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으로 골랐어요. 위에서, 멀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가장 아래에서 가장 낮은 관점에서 올려다보면서 글을 쓰는 작가들을 골랐어요. 예를 들면 존 버거는 우람한 말이 아니라 작은 당나귀에 주목하고, 당나귀에서도 당나귀의 얼굴이나 몸이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게를 실어 나르는 가늘고 얇은 네 다리에 주목하는 것과 같은 관점, 즉 가장 약자들의 관점에서 사회나 자연을 바라보면 ‘너무나 불공평하구나!’라는 것이 보이죠. 제가 보기에 이런 관점은 마치 예수님의 관점과도 비슷할 것 같아요.
Q : <느낌의 0도>에서 풀밭에 누워 중력을 감각으로 느끼며
‘내가 저 하늘로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주는 중력의 힘, 그 힘에 의지하는 게 얼마나 평온한 지를 느꼈다. 중력의 은총을 쓴 프랑스 사상가 시몬 베유는 중력이란 낮은 쪽에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우리를 낮은 쪽으로 향하게 하는 힘, 중력.’
이라고 쓰신 대목이 떠오르네요. 또 다른 기준이 있나요?
A : 마지막으로 하나 더 기준을 말하자면, 이들은 삶에서 명예, 권력, 돈을 앞세우지 않아요. 세속적인 것에서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지요. 성취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안 보이는 것을 볼 줄 아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들을 골랐어요. 이들이 깨어 있는 감각의 중요성을 말 한 것은 그저 우리가 마음만 바꾸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면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른 느낌이 깨어나고, 그러면 누구든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죠. 여덟 명의 작가들은 모두 다른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고 사랑하는데 헌신한 사람들이에요. 이 세 가지가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그 중에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모두 좋은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가능성을 향해 연대하며 저항 할 때 진정한 자유인
Q : 책에서
‘마지막 아홉 번째의 상상력,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상력이자 이 책을 읽고 감각이 새롭게 일깨워질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고 싶다‘
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독자들에게 던지는 숙제인가요?
A : 좋은 삶을 살고 싶지만 혼자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인 역량만으로는 지치고 사회적인 압박을 감당하기도 힘들어요. 저도 이 책의 작가들이 말하는 삶을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도 남들도 역량이 안 되고 힘들겠구나 하는 것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가능성을 향해 연대하며 옆으로 네트워크를 넓혀나가는 것이 필요하지요. 제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로 이 책을 끝맺은 것은 우리가 저항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예요 그런 의미에서 길목처럼 다른 삶을 생각하는 모임이 반가웠어요.
환경문제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변해가는 미래 때문에 겪는 불안
Q :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물리적인 환경이 점차 오염되고 살기 힘든 곳으로 바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내면의 문제, 즉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불안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마음이 현재보다는 미래로 가 있고, 그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에요. 어제 한 일을 내일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없는 사회잖아요. 단단한 땅위에 발을 딛고 서 있지 못해요. 마치 가뭄으로 거북등처럼 갈라진 절벽 위에 서 있기에 자칫 발을 잘 못 디디면 밑으로 떨어지고, 한번 떨어지면 다신 일어서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인해 이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조차 편안하게 미래를 기다릴 수 없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 환경문제와 함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Q : 대학교의 학생들도 그런 영향을 받나요?
A : 대학이 불안감을 부추기는 첨병이 되고 있어요. 학생들의 불안감을 부추기죠. 이렇게 해서는 취업 못한다. 인문계 나와서는 취업 못한다. 너희 살아생전에 직업이 몇 번이나 바뀔 수 있다는 둥 온갖 이야기를 다하지요. 대학교 때 어학연수 안가면 큰일 나는 것 같이 이야기하고, 학생들은 일학년 들어오자마자 졸업 후를 걱정하며 불안해해요. 그러니 대학생들이 차분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스펙을 쌓으려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아마도 하이데거를 읽자고 하면 교수가 미쳤나 할 거에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불안하죠.
Q : 그렇다면 지금 대학생들이 선생님 대학시절처럼 책을 읽고 학생운동을 하고 살 수 없는 것이 취업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보시나요?
A : 짧게 보면 취업에 대한 불안이지만 멀리 보자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Q :욕망이 커지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A : 사회가 자꾸 욕망을 부추겨서 천천히 살아가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요. 대학생들뿐 아니라 40~50대들은 또 건강이나 노년빈곤에 대한 불안감이 있지요. 그런 식으로 사회가 모든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살게 두지 않고 불안을 조장하니 사람들의 욕망은 점점 커져서 더 쌓아놓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불안은 사람들 내면에 분노를 만들어내요.
Q : 마음 어두워지는 이야기이네요. 그러면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느낌의 0도>에 소개된 8명의 작가 외에 다른 분들을 소개하는 후속 작업을 계획하고 있으신가요?
A : 아직은 그런 생각은 안 해보았어요. 이 책은 그동안 여러 곳에 실었던 글을 기본으로 했지만 그때 쓴 짧은 글과는 달라서 다시 작업을 하느라 힘이 들었어요. 한 작가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그들을 한 주제 아래 엮고 배치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여러 저서와 인터뷰 글들이나 다른 보충자료를 찾는 일에 시간과 힘이 많이 들어서 두 번째 책은 아직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책이 제 경험을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제가 쓴 책에서 아무나 한 작가를 골라 다시 읽으면 처음 그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나서 내 물음에 응답을 해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어줍니다.
박혜영 조합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느낌의 0도>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이 책에 소개 된 여덟 명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도 있고, 그 책이 읽고 싶어 샀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둔 이도 있고, 이름만 들어 본 이도 있고, 생전 처음 만나는 이도 있습니다. 박혜영 조합원 덕분에 그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느낌의 0도>에 소개된 여덟 작가의 책들이 궁금해져서 박혜영 조합원의 글을 등대 삼아 한권씩 읽어보겠노라는 큰 결심을 해봅니다. <느낌의 0도>에는 시가 여러 편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무심코 읽었을 그 시들이 ‘문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던 그의 말과 함께 더 의미있게 읽혀집니다.
그리고 마음에 와 닿았던 많은 구절 중 몇 구절을 소개해봅니다.
모든 존재가 얼마나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이 덜어지지 않고서는 나의 운명도 나아질 수 없는지 <느낌의 0도 183p>
우리는 때때로 책에서 눈을 들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고 냉방을 하고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누군가 먼 곳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느낌의 0도 189p>
소로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개인의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마지막 장을 소로에게 헌정하기로 한다. <느낌의 0도 207p>
산책의 절반이란 결국 온 길을 되돌아가는데 있듯 지상에서의 산책도 이제 길을 돌려야 할 때이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은 길을 오래된 지혜 속에서 찾아야 할 때이다. <느낌의 0도 22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