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시회를 두 번 간 이유는, 어떻게 개인이 아닌 가족이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에 대한 궁금증과 교회 인재이신 분이 설명을 해 주는 귀한 기회가 만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주이씨 백사파 가문에 시집을 간 사람으로서 두 자녀, 남편과 함께 전시회를 다시 찾기 위해 사전 답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시회에서 나의 뇌의 첫 반응은 ‘이럴수가’였다. 아니 집안이 왜 이렇게 똑똑해? 헉, 땅이 왜 이렇게 많아? 남양주 대부분과 명동의 한가운데가 다 집안 땅이었다니...이럴수가.....
김 창희 장로님의 재미지고 재미진 설명과 전시회의 글, 사진들을 보며 나의 두 번째 뇌의 반응은 ‘와~우 대단’ 이었다.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김창희 조합원의 해박한 지식과 재미난 설명에 ‘와~우 대단!’ 그리고 한 개인도 아니고 한 가정도 아닌 6형제 전체 집안의 식솔들이(50명을 넘는) 어떻게 한 마음으로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지?.....‘와우~대단!’ 없는 살림이면 모를까 비록 식민지 치하라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잘 살 수 있는 재산과 능력이 있는 데...어떻게 그 많은 기득권을 버리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와~우 대단!’
그렇게 감탄하다 보니 어느 새 전시회 관람과 설명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이 되었다. 그 많은 재산(600억 원이 훨씬 넘는)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투사 양성에 힘쓰고, 신간회 활동, 임시정부 활동(연세와 학식, 연륜이 높은데도 미래주역들을 위해 백범 김구 선생 등을 내세우고 당신들은 그들의 버팀목으로 섰던 점을 비롯한 여러 헌신적 활동), 무정부주의 활동, 독립운동 중 6형제 대부분이 고문과 배고픔 등으로 돌아가신 것을 설명 들을 때쯤 되니... 이제 나의 뇌 속의 감동은 저절로 몸으로 표현되었다. 엄지 척!!
첫 전시회 관람이후 그 감동과 먹먹함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이회영 집안과 활동에 대해 더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열흘 정도 후 우리 가족끼리의 방문이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고 오후 늦게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를 다시 찾았다. 남편과 아들, 딸은 집안의 위대한 조상인 그들의 삶을 일일이 다 읽어가며 관람하였다. 가족 모두가 만족한 값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회영과 6형제의 치열했던 삶은 나와 우리가족에게 고스란히 고민을 남겼다.
‘나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애국은 민중해방과 동일 스펙트럼인가?’
‘기득권을 버리고 살 수 있는 강한 이끌림...참 삶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