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하지만 상쾌한 가을의 아침을 느낄 수 있는 11월 초, 배기봉 선생님과 함께 하는 성곽기행에 참가하였습니다. 우리의 행선지는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광희문까지였는데, 한양도성 성곽의 역사와 서울의 지역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혜화문과 광희문은 어디에 있나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한양을 둘러싸는 성곽을 세웁니다. 성곽은 동서남북에 각각 4대문을 두었고, 4대문 사이에 4소문을 두었습니다. 혜화문은 동쪽과 북쪽 사이에 있는 동소문이고, 광희문은 동쪽과 남쪽 사이에 있는 남소문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양성곽의 동쪽 성벽을 따라 걸었던 것입니다.
단풍이 예쁘게 어우러진 성곽 길은 운치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덤으로 주어진 기쁨입니다.
한양도성 성벽의 돌들은 왜 다른가요?
조금만 살펴보면 성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의 색과 크기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곽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태조가 성곽을 축조할 때는 돌을 다듬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 쌓았다고 합니다.
20년쯤 뒤 세종은 돌을 사각형 모양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습니다.(사진의 왼쪽 끝부분) 또한 성곽 위에 얹혀진 담장 같은 부분(여장)과 활이나 총을 발사하는 용도인 구멍(총안)이 이때 추가로 축조되면서 성곽의 높이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300년 뒤 숙종 때에도 성곽보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돌을 크고 반듯하게 정방형(정사각형)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습니다. 성벽의 한 부분을 통해서도 긴 역사의 흐름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서울에 이 성벽이 남아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서울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그만큼 과거의 흔적들도 많이 지워져서 아쉽군요.
광희문
신당동 이름의 유래를 아십니까?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광희문(위 사진)으로 내다가 공동묘지가 있던 금호동, 왕십리 쪽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서 광희문은 시구문이라고도 불렸고, 시구문 밖에는 영혼을 위로하는 신당이 많이 있어서 신당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곽 근처이다 보니 성곽을 지키는 병사들이 머물렀고, 그래서 군인들이 타는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필요했습니다. 말을 키우는 목마장이 있었다고 해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 바로 마장동입니다.
군인들의 연장도 고치고, 농기구나 무쇠 솥을 만드는 등, 쇠를 다루는 대장간이 많다고 해서 얻게 된 지명은 금호동입니다. 광희문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대장간을 볼 수 있었는데, 왜 그곳에 대장간이 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친구의 과거사를 알게 되면 그 친구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서울의 역사를 알고 나니 서울이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동대문 패션시장 하루아침의 우연이 아니다.
한 마을이 특색을 이루며 형성되는 데에도 역사가 존재합니다. 동대문도 이런 사연이 숨어있는데요, 궁금하시면 다음번 성곽기행에 참여하셔서 확인해주셔요~
(사진 : 배기봉 조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