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만나는 새로운 세상
지난 늦가을, 둘째를 본 조카가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4살 첫째가 동생이 태어난 난 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며 걱정과 불안을 털어놓았다. 큰 아이 출산했을 때 한두 가지 조언을 했는데 듣지 않아 내심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터라 그러게 내 말 좀 듣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린 아이가 겪고 있는 아픔이 짐작이 되어 마음이 아팠다.
그 아이는 엄마가 둘째 임신을 알았을 때부터 떼가 심했고, 엄마 배가 부르기 시작하자 더 예민해져서 배를 가리라며 부른 엄마의 배를 보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동생이 생긴다는 것,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동생이 태어난 직후에는 그 불안이 부모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심각한 듯 했다.
큰 아이 출산할 때 했던 조언은, 출산 후 엄마와 아기가 같이 있고, 산후조리원에 가게 되면 아이와 같은 방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하면 엄마가 1년 정도 육아휴직을 내면 아기에게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조카네는 아내의 선택을 따랐던 것 같다. 열 달 산모로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고, 아이 낳고 앞으로 몇 년간 육아하느라 고생할 텐데 이때 아니면 언제 편하게 있느냐며 산후조리원을 선택한 듯 했다. 물론 조카며느리 뿐 만 아니라 요즘 대부분 아기 엄마들의 선택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조심스레 했던 이야기였다. 게다가 조카네는 맞벌이라 아기엄마는 2개월 육아휴직하고, 아기는 친정엄마와 베이비시터에게 번갈아 돌봄을 받다 너무 이른 나이에 유아원에 보내졌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혹시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몇 년 만에 염려가 현실이 되니 마음이 복잡했다.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를 생각해보면, 산고를 치른 산모 못지않은 고통을 겪으며 태어난 아기가 너무 낯선 세상에 나왔는데 뱃속에서 익숙하게 들리던 엄마의 목소리도, 엄마 냄새도 없이, 여기저기서 무섭게 울어대는 다른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그 아기는 아마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엄마가 버려둔 것 같은 심정일거라고 짐작된다. 손과 발을 뻗으면 닿던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나 만난 세상은 너무 낯설고 너무 크고, 알 수 없고, 잘 보이지도 않는 환경을 아기는 아마 광활한 우주에 혼자 떨어져나온 공포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기에게 새로운 세상은 악몽 같아 그 악몽에 압도될 수 있다’. 요즘 공부하는 아이건 박사의 ‘정신증의 핵’에 나오는 대목이다.
위니컷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분만 후 몇 주 동안 산모가 일차적모성몰두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아기에게만 몰두하는 특별한 심리상태를 말하는데 이때 엄마는 아기와 무의식적인 소통을 하고, 아기와 동일시되며, 아기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느낀다. 유아기 초기에 충분히 좋은 환경이 제공되면 자아형성에 도움이 되고, 본능을 조절할 수 있으며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좀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기는 존재 연속성이 방해되고 심지어 멸절불안에 시달리며, 건강한 자아발달이 어렵고, 성장과정에 심한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 이런 불안이 달래지지 않은 상태에서 동생이 태어났으니 조카의 큰 딸은 불안과 위협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을 것이다.
우리 할머니들 시절을 생각해보면, 아기를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달아 낯선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그건 아기와 엄마만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폭 쌓아놓아 아기의 불안을 달래고, 아기를 안아들 때마다 미리 말을 걸어 안심을 시키고, 수시로 말을 걸어 가까운 곳에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아이가 울 때 마다 정서적 소통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어른들은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요즘 아기들은 대부분 이런 시간들이 박탈된다. 참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잠만 자는데 뭘 알겠느냐는 이야기는 아기에 대해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위험한 생각이다. 아기가 뭘 알겠느냐고 하면서 정작 태교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누군가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상업적 자본주의 논리에 빠져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지 생각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