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KBS YOUTUBE자료 캡쳐)
삶, 쌈, 사람으로 진화되어 가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벽’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기댐 벽 말고, 사람을 숨막히게 압도하는 벽.
“당신과 이야기하면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아!”라는 싸움 끝의 절규.
아…. 내가 벽으로 불린 순간, 차라리 그게 대못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절망감에 허우적대며, 부부싸움 하기를 몇 년. 대부분 신혼기에 티격태격 서로를 알아가는 조정기를 거치는 게 예사인데, 나의 경우 서로 너무 바빴기에, 둘 다 40대 조기퇴직하고 집 안에서 마주하며 그제야 서로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란 친구의 해석에 기댔다. 나만의 고통이 아닌 모두 예외 없음에 위로하며 이제나저제나 나아지길 기다렸다. 1년…3년…5년. 아침이면 오늘은 무슨 일로 폭탄이 터지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늘 우울했다. 내가 온통 문제투성이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성토 받는듯했던 긴 시간, 내 속은 허물어져서 갔고…그 무더기로 분노의 ‘벽’을 쌓았나? – 작용-반작용의 법칙?!
그의 아픈 비명은 인연이란 것이 거미줄같이 너무도 가벼운 것이란 두려움까지 느끼면서도, 상대를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애썼던 나의 처절한 노력, 고통을 깡그리 부정한 것으로 들렸고, 여전히 줄을 부여잡고 노력하는 난 괜찮은 사람이라는 마지막 존재감까지 날려버렸다. 나라는 ‘인간’이 부정되던 그 순간 그저 멍하고 아득했다. 허무, 자괴, 분노 등등의 감정을 떠올리며 그 충격에 대입해보려 했으나 딱히 맞아떨어지는 건 없더라. 뒤이어 짧은 순간 선명히 흐른 냉소는 그것을 수긍하면 죽을 수 있다는 내 안의 엄청난 생명력, 위험경고체계의 일부였을까? 생존의 메시지 – ‘적의 선전문구에 현혹되지 마라! ‘나는 가슴에 망치질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엄청나게 꿈틀대는 공격성… ‘그래 난 벽보다는 대못이고 싶다!’ 그래도 그때 ‘못’ 아닌 ‘벽’으로 행동한 내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 시절 내 모습의 단서를 찾는다면 어릴 적 살갑지 않은 막내로 연결할 수 있을까?
절대 지지 않으려는 악바리 – 어른 말에도 긍정의 끄덕임 하나 보이지 않는 꼿꼿함은 매를 벌었다. 이를 앙다문 고집. 늘 언니, 오빠에게 좋은 것 다 뺏기고 찌꺼기만 받는다는 피해의식에 철갑을 두르고 세상에 대적하려 했었나? 어릴 적 그 아이의 심리는 흐릿하기만 하다.
엄마가 심부름시킬 때면 주문내용을 듣는 척도 안 하고, 딴청 피우는 막내에게 반응을 다그치다 그만 지친다. 상대의 말을 담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왜 그리 어색하고 싫었을까?! 고분고분한 자세가 이미 지는 거라는 느낌? 이미 주문을 간파한 꼬마에게 부가되는 몇 마디의 그 쓸데없음이 왜 그리도 참을 수 없는 성마름을 자극했을까? 결과에 만족한 엄마는 더는 닦달하지 않고 그 후로도, 그리고 지금까지 내 물기 없는 방식을 품어주신다.
내 성깔을 죽이지 않은 엄마 덕(탓?)에 성인이 되어선 혹독한 값을 치른다. 나만의 이해와 만족으로 끝나지 않는 사회생활. 문제의 약한 고리는 듣기 태도와 함께 성장하지 못한 나의 말하기! 회의에서는 몇 번을 속으로 되씹고서야 얼굴이 상기된 채 겨우 한두 마디 할 수 있었고, 전 직원을 몇 번 들큼한 잠으로 떨어지게 하는 발표의 과정은 참으로 끔찍했다. 온 힘을 다해 태연한 척 버텨내던 회사생활의 족쇄를 풀고 그저 내 원형 그대로 존재할 뿐인데, 남편이 내게 요구해왔다. 그 끔찍한 ‘말’을 하라고. 내 속에 뭐가 있는지 표현하라고…헉! 가족은 내 모습 그대로 품어주는 것 아니었던가….?!
남편의 그때 그 절규가 없었다면, 난 아직도 그에게 심장도, 감정도, 들을 귀도 없는, 불통의, 절망의 벽으로 존재하려나? 내 인생 최대의 충격 이후 시간은 그도 나도 왜 날 품어주지 않는가에 대한 불만의 고통을 잠시 늦추고 서로 자신의 품을 넓히는데 사용한 듯싶다. 서로의 내적 건강을 회복한 몇 년 후, 난 한 단계 upgrade됐다. 이제 그는 날 단칼(별칭 一刀女史)이라 부른다. 내가 다시 도구를 쓰는 ‘사람’으로 등극한 것이다!
지금도 가끔 ‘도대체, 눈을 마주치던가! 아니면 듣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던가!’라는 기분 상한 남편의 투정을 듣곤 하지만 함께 헤쳐온 시간 덕에 내 존재를 다시 무생물화 하진 않으리라 기대한다. 지금, 그가 나를, 내가 그를 이만큼 살아낸 게 대견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겪어낸 싸움 덕이리.
이젠 좀 관계가 편하냐고? 아직 남은 삶의 고삐를 늦추기엔 이르다. 그래서 난 오늘도 그를 향한 칼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