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
언젠가, 언제나 당당하고 어디서든 주체적이던 선배의 조금은 위축되고, 불편해 보이는 모습을 접한 날이 있었다.
나에게는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존경하고 따르는 선배이기에 그런 모습이 낯섦을 넘어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한테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믿음이 강했다. ‘이 사람은 뭐든 잘할 거야.’, ‘이 사람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을 거야.’, ‘이 사람은 항상 옳을 거야.’, ‘이 사람은 늘 한결같을 거야.’
이렇듯 내가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무한 신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환상’을 갖고 있었다. 내가 만든 그들의 이미지가 많은 부분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항상’, ‘언제나’, ‘늘’과 같은 수식어는 ‘환상’이다.
이것이 환상이란 것을 나는 꽤 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들을 동경하며 내 안에서 신격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더불어 신과 같이 완벽한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한없이 부족한 나를 채찍질하는 끔찍한 시기가 있었다.
그들처럼 완벽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만 내 존재에 의미가 있을 것 같았고,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 또한 한없이 열심히 하려 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싫은 내색과 거절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에너지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애를 쓰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환상의 쳇바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또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는 내 존재를 확인받고 인정받는 것 같아 피곤해도 꾸역꾸역 응했고, 그와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길 바라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다.
물론 이러한 선택과 경험이 내가 성실한 사람, 배려 깊은 사람, 그리고 품을 수 있는 가슴이 더 넓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긴 했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순간 에너지가 고갈되었고, 내가 해주는 것들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분노가 일어났으며, 몸의 건강까지 많이 안 좋아지기도 했다. 애를 쓰면 쓸수록 그들과 같은 완벽한 존재에서 나는 더 멀어지고만 있었다. 결론적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하고 불안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쳇바퀴 돌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고, 그동안의 내 노력이 헛것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란 존재의 필요가치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선택한 행동들이 다행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의 방향(노력)이었다고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언젠가 아프기 마련이다.
우주는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우주의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에 어긋난 삶의 방식이었다.
요즘 코로나로 여행을 못 가는 마음을 달래보고자 여행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다가 두어 번 갔던 안나푸르나를 만났다.
네팔어로 ‘나마스떼’라는 인사말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이다.
여러 신을 믿는 나라여서 이런 인사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안나푸르나를 오르내리면서 만나는 이들과 계속해서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주고받으며 알게 되었다.
‘아, 내가 영적 존재라는 의미구나. 내 안에 신성이 존재하고 나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다는 표현이구나.’ 또한, ‘당신 역시 신성을 갖고 있는 온전한 존재라는 존경심의 표현이구나.’
이제와 고백컨대 위에 쓴 지난 내 선택과 행동들은 그 누구를 위한 것 이전에 사실 나를 위한 행동들이었다.
힘이 들고 여력이 안 되어도 사람들의 도움요청에 응하고, 여러 일을 맡아서 기여하고자 했던 것들 모두 사실은 내 존재를 확인받기 위함이 먼저였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이걸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슬프고 안쓰럽고 미안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내가 나와 연결될 틈 없이 내 외부로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나는 계속 허전하고 공허했으며, 탈진해 갔다.
애를 쓰면 쓸수록 이러한 상황은 더 심해져 진이 빠지고, 이로 인해 사람들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일었으며, 내 노력과 시간이 허비된 것에 한없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마스떼!”
“그대 안에 신성이 존재함을 믿을 수 있나요?”
“그대가 신성 자체임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나의 존재는 누군가, 무언가로부터 확인받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존재함으로 충분하고 온전하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그리고 여전히 쳇바퀴를 굴리며 사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제 “그만”을 요청한다.
“다른 많은 사람의 요청은 그리도 잘 들어주는 네가,
유독 나의 요청엔 귀를 닫는 것에 어떤 질책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동안 애쓴 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다만, 이제는 보이는 것을 보고, 느껴지는 것을 느끼며, 들리는 것을 듣고, 냄새나는 것을 맡으며,
나는 네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내 옆에서 온전히 즐길 수 있기를 바래.
나는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해.
너는 이미 모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우주가 바로 너니깐.”
이 말을 가슴으로 믿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