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망망대해(茫茫大海)
올해도 어김없이 심심엔 기고할 시간이 돌아왔다. 길목인에 벌써 세 번째 기고하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에 기고할 원고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루틴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쓴 지난 글들을 읽어보면, 지나치게 솔직한 심정을 내 보인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를 잘 모른다는 이 묘하고 매력적인(?) 상황이, 오히려 나를 좀 더 솔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마치 가족들에게도 친한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처음 만나는 기차 옆자리의 승객에게 털어놓는 심정으로.
2020년과 이제 절반을 막 지난 2021년은 세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코로나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와중에, 나는 남들이 이미 10~20년 전 겪었을 인생의 큰일들을 불과 1년 안에 압축하여 경험하고 있다. 세상은 코로나 덕분에 유래 없는 고요함, 지루함,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나의 세계는 새롭게 맞는 관계들로 격하게 출렁인다. 아무런 구속 없이 오랫동안 자유롭게 살다가 다른 사람들과 타협하고 맞춰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 누군가를 평생 믿고 의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것,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를 맞이한다는 것.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런 일들은 그저 두려우며, 나에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일들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얼떨결에 (정말로 얼떨결에) 이 일생일대의 변화 한 가운데서 정신없이 헤엄치고 있다.
어떤 분들은 칭찬과 격려를 주셨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너무 두려워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에 나를 던져 넣은 용기와 결단에 대해. 내가 헤엄치던 깊은 심해에서 바다 표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문득문득, ‘심해어인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색하고 당황스럽다. 감정적으로 격하게 달아오르고 분노와 공포에 사로잡히는 갈등 상황을 종종 겪으면서, ‘역시 이것이 내 원래 모습이지’라며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3년만의 폭염과 코로나로 아무데도 나가지 못하면서 집에 늘어져서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진 와중, 가끔 엄청난 공포가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평생을 믿고 의지할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신 앞에서 했는데, 그 약속이 너무나 쉽게 깨어질 수 있을 거라는 불안한 순간들을 꽤 자주 맞닥뜨린다. 서로 악다구니를 쓰며 바닥을 드러내고 할퀴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정말 어디론가 딱 증발해 버리고 싶다. 나도 너무 약하고 상대도 너무나 약한 인간에 불과한데, 도대체 서로의 지독함과 못남을 어떻게 그 오랜 세월 견딜 수 있을까.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약하디약한 그 약속에 기대는 것은 얼마나 혹독한 일인가. 이런 생각들에 더욱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드는 이놈의 코로나는 또 얼마나 지독 한가.
그렇게 한참 혼자 심연을 헤매다, 문득 전혀 생각지 못하는 순간에 뜻밖의 위로를 받기도 한다. 오늘이 그랬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나만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 관계의 바닥을 자신도 경험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는 깔깔대며 말하는 친구. 잠시 동안이지만 숨통이 트이고 내 세상이 좀 가볍게 느껴진다. 나도, 남들도, 결국은 다들 비슷한 인간이구나, 하는 공감과 동질감의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