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군유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 3년차이다. 첫해 여름에 시작했으니 만으로는 2년이 된 셈인데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다지 성공적인 프로그램은 아닌 듯하다. 초기부터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처음 군유가족을 위한 개인상담 매뉴얼을 만들면서 여러 책, 논문, 매뉴얼 등을 많이 참고했는데 많은 자료들 가운데 핵심은 복합비애 개념이었다. 지금은 지속비애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은 이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비정상적인 애도반응이다. 애도가 정신병리로 범주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중요한 타자의 상실에 대한 애도반응은 어떤 문화에서든지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애도반응을 병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비정상적인 애도반응은 DSM-5(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 지속비애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들어가 있다. 사실 군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매뉴얼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각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복합비애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매뉴얼을 만들다 보니 CGT(Complicated Grief Therapy) 매뉴얼을 많이 인용하게 되고, 저자의 강의도 몇 번씩 들어보게 되었다. 저자가 처음 이 프로그램을 소개할 때만 해도 이 프로그램으로 외상적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약물이나 인지행동 치료에 비해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대해 자신 있게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자의 최근 동영상을 보면 상당히 겸손해진 모습이다. 어떤 기법이나 교육보다도 결국 유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은 active listening이라는 것이고, active listening이 결국엔 여러 경로를 거쳐 healing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유가족 개인 상담을 많이 진행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내담자들에 비해 그분들은 초기에는 오히려 상담에 대한 반감이나 의심(?)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고 ‘어떻게 하는지 보자’라는 마음으로 오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개인적인 욕구나 필요에 의해서 상담을 진행하시기보다는 군인권센터를 돕는다는 의미에서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다 보니 매뉴얼을 만들기는 했지만 절대로, 어떤 유족들도 매뉴얼에 의해 상담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일반상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유족들의 경우는 죽음의 이유도 너무 다양하고 상실을 처리하는 방식도 너무 다양한 데다가 사고사와 달리 자살의 경우에는 아들의 죽음을 아주 친한 친지나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못하기 때문에 애도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데 그분들의 상담이 일반상담과 다소 차이가 있는 점 중의 하나는 어느 시기가 되면 완전히 마음을 다 여는 것이다. 순차적, 점진적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라, 3회기, 4회기까지도 의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시다가(그 순간까지는 양적 변화가 있었다고 봐야 할 수도 있겠다) 어느 순간 그냥 마음의 거리가 확 좁혀지는 것이다. 매뉴얼의 어떤 안정화 기법이나 트라우마, 복합비애의 교육 등등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CGT저자의 겸손해진 의견처럼 active listening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담을 마치고 가장 좋았던 부분에 대해 종결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냥 긴 시간 본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고맙고 좋았다고들 하셨다. 첫 번째 시간에 세 시간을 내리 이야기하신 어머님은 상담 이후에 처음으로 잠을 편히 주무셨다고도 했다. 아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긴 시간 이야기를 해보신 경험이 없다고들 하셨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이라고 해도 두어 번 말하면 ‘그만해라’, ‘잊어라’ 등의 말을 던질 뿐 아픔의 경험에 긴 시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이다.
대학원 졸업 무렵 수업시간에 필드에 나가서 환자나 내담자를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된다는 말을 동기들과 주고받던 중 담당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입은 다물고 듣기만 하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에 새겨져 잊히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입 다물고 듣기만 하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어서 듣다 보면 자꾸 입을 열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군유가족 상담의 경우에는 입을 열기 쉽지 않고 매뉴얼에 있는 내용을 잠깐씩 전달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입을 열 일도 없다. 어머님들이 일단 마음을 열면 특히 상담자는 입을 열어 말할 기회는 없어지고 어머님들이 말씀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어머님들께 상담에 대해 배우는 기분이 든다. 어머님들은 아들의 죽음 이후 죽을 것 같던 삶에서 본인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이야기해주시고 준비해 간 워크북을 보시면서 이 부분은 이렇게 수정하면 다른 유족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해주시곤 한다. 최근엔 영주에 사시는 어머님이 상담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주변에 연결되는 상담사가 없어서 매주 영주에 내려간다. 처음에 스터디카페에서 만났는데 너무 답답하시다며 풍기에 있는 별장(?) 같은 곳에서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며 평상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아들을 보내고 답답한 곳이 더 싫어졌다며 풍광이 좋고 뻥 뚫린 곳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하신다. 매주 풍기에 오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덕분에 매주 소백산 자락의 바람과 하늘과 풍경을 보면서 오히려 힐링되는 느낌이다. 게다가 지난주부터는 식당에서 밥 먹지 말고 먹고 가라시며 텃밭채소를 뜯고 햇반을 가져와 밥을 차려주신다. 이쯤 되면 상담이 어디로 가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머님 얼굴이 한결 밝아지시는 걸 보면 안심이 되기도 한다.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괜찮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상담을 한다면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 어느 일이든 힘들지 않은 일이 있겠냐고 하면 수긍을 하다가도 남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일이 뭐가 좋겠냐며 힘들겠다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반면에 상담에 엄청 관심을 가지고 상담에 대해 궁금해하고 방법을 물어보는 분들도 있다. 상담을 하는 것, 상담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상담사에게는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대학원 다닐 때 지도교수님의 말처럼, CGT 프로그램의 Shear 박사처럼, 그리고 많은 슈퍼바이져들의 충고처럼 그냥 입은 닫고 귀를 여는 것이 첫 번째가 아닐까 한다.
지난해부터 여의도에 다른 유가족들 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힘든 시절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은 자식을 둔 민주화 유가족 분들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다른 것들은 내려두고 열린 귀만 가지고 찾아뵈어야겠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