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다. 내담자가 감정 없이 덤덤하게 하는 말들을 상담자는 그 말속에 숨은 정서를 느껴, 그 정서에 이름 붙이고 말로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 상담자로서 낙담을 하게 된다.
예전에 어떤 수업에서 교수님이 사람의 감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어쩌면 수천 개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간혹 떠올라 감정을 다양하게 느끼지 못하는 내 무능함에 속상하기도 하다.
내담자를 만나는 시간뿐만 아니라 반대로 내 분석 중에도 깊은 마음속에 어떤 정서가 있을 텐데 느껴지지 않아,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느끼기보다 머리로 감정을 떠올리곤 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어떤 행동이 떠올랐고 그런 행동을 한 내 머리를 변기에 처박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스스로를 공격하고, 머리로 하는 생각이었고, 진짜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은 마음이 너무 아파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다였다.
한번은 내 분석 시간에 감정은 느껴지지 않고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가 떠올랐다. 감정은 떠오르지 않고 그 독사가 떠오른다고 이야기했더니 선생님은 감정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래 두면 독이 된다고 하셨다.
상담 공부를 하기 전에 나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때때로 지독히도 우울하고 무기력했지만 난 비교적 긍정적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그런 우울한 감정을 외면하며 살았었다. 감정이라면 희로애락 정도만 있고, 그 정도는 느끼니 별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담 공부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을 대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가 참 어렵고 힘들다.
내담자 A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던 똑똑한 전문직 여성이다. 그런데 그분을 보고 있으면 한쪽은 잎이 무성한데, 다른 한쪽은 앙상한 가지만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연상되었다. 지적인 면에서는 무성한데 정서를 느끼는 부분에서는 말라 보였다. 정서적인 이야기를 나누면 접촉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느낌을 묻는 상담자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했다.
내담자 B는 가까이 어른들이 많았지만,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 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힘겹게 버티며 살았다. 특히 할아버지는 꽤 재력이 있어, B가 사는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집에 미술품이며, 골동품이 많았는데, 정작 손자, 손녀가 굶는지, 추운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방치된 채로 자랐다. B는 그런 어른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화병이 생겨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 숨을 쉴 수 없다고 한다. B의 말로는 자기의 남동생은 그나마 화도 느끼지 않아 두 남매의 대화가 잘 안 되고 답답할 때가 있다면서 동생은 감정을 거세했다고 표현했다. 그것이 동생이 살아남은 방법이었을 거라고 했는데 '감정의 거세'라는 말이 너무나 아프게 들렸다. 화병에 걸린 자신보다 아무 느낌 없는 동생이 더 걱정이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적절하게 느끼지 못하면, 정서적 공감을 하지 못해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자신을 돌보는 최소한의 방어도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무례한 언행을 했는데 화를 느끼지 못하면 그 관계에서 적절하게 자신을 변호하지 못한다. 또는 내 연상에서 나온 독사처럼 그 독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B의 남동생처럼 째깍거리는 폭탄을 안고 있는 위험천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의미 있는 사고하기(thinking)가 어렵다고 알프레드 비온은 말했다. 비온은 정서적 경험이 사고 과정의 첫 단계에 위치해 있고, 정서가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정서를 충분히 소화해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