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인터넷에 출산율과 관련한 이런저런 뉴스가 뜨지 않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1이 안된다느니, 이러면 경제활동 인구가 부족해질 것이고, 국민연금도 고갈될 것이고, 곧 대한민국 소멸의 시기가 올 것이고 등등의 뉴스를 보면, 지금껏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열심히 쓴 돈은 다 어디 갔는가 싶고, 이제 (나를 포함한) 노인들만 가득한 세상에서 느린 종말을 기다리며 우울하게 살아야 하나 급 불안해집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이미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차츰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며, 노동력이 부족해서 잘 살기 어려워질 거라는 걱정을 할 것이 아니라, 적은 숫자의 국민으로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는 신선한(!) 주장도 어제 읽었습니다.
어느 말이 더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성년이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인생 경로라는 생각은 어느 때부터인지 완전 구닥다리 같은 사고방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귀해지고 있는데, 많지 않은 그 아이들을 잘 키워낼 마음가짐을 우리가 사회가 갖고 있는지, '라떼'로써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이 글은 실은 '동화책(을 읽어주는) 관련 앱'에 관한 광고를 보고 들었던 생각들이 있어, 한번 적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 광고를 본 것은 전철 안에서였습니다. 광고 카피는 이랬습니다.
"3살, 유학 보내기 딱 좋은 나이, 동화 속으로 유학 보내주세요. 시작하자 아이들 나라 동**라"
제 기억으로, 아이들이 어느 때가 되니 귀찮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반길 만한 행동입니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엄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책을 들고 무릎 위로 기어오른다는 것입니다.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는데...라는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니 아이를 동화나라 속으로 '유학' 보낼 수 있다는 광고 카피는 꽤 유혹적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동화책을 들고 엄마한테 오는 것은, 동화내용이 궁금해서만이 아닙니다. 동화책을 엄마와 함께 읽는 경험은 엄마의 온전한 관심을 받으면서,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거죠. 동화내용도 흥미진진한데, 엄마가 나랑 같이 이걸 읽어준다고? 내가 모르는 건 설명도 해주고, 나랑 같이 웃기도 하고, 무서운 괴물이 나오면 얼굴을 찌푸리며 흉내도 냈다가, 내가 무섭다고 하면 안아주기도 한다고? 내가 재밌어하는 걸, 엄마도 좋아해!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혼자 유학을 보낸다?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동화 속으로 혼자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이상한 말일까요? 아이가 어릴수록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니 이런 가상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더욱더 실제 사람과의 연결 속에서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동화 속에서 온갖 즐거움과 흥분, 쓸쓸함, 불안이나 분노, 두려움까지도 느끼다가 다시 현실로 안전하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손잡아 안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 권의 인기 전집이 겨우 커피 2잔 값"
이건 정말 최악의 카피입니다. 출판계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이 분개하고 일어나 마땅한 발언입니다. 힘들게 공들여 만들었을 중요한 창작물들의 가치를 고작 커피 몇 잔 값으로 평가절하했습니다. 또 마치 천 개의 선택지가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건 아이들을 잘 모르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니죠. 혹시 여러분도 넘쳐나는 OTT 드라마와 영화의 홍수 속에서 정작 무얼 봐야 할지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으신가요? 아이들에게 천 권의 책은 필요치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꽂히는 단 한 권의 책이 어느 시기에 필요합니다. 엄마들은 알 겁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똑같은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었는지요. 그때는 아이에게 그게 필요했던 거죠. 무언가를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즐거워하거나, 그걸 소화하고 친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혹시 저런 광고를 보고, 커피 두 잔 값에 천 권의 동화책을 받아 들고, 아이가 그걸 다 읽지 않는다고 윽박지를 엄마가 있을지 걱정됩니다.
"자면서도 독서하는 아이로 키우는 법"
독서를 많이 하면 공부 잘하는 머리 좋은 아이로 자란다고 하니, 잠자는 시간까지도 책을 읽게 하려나 봅니다. 이런 광고 카피에서는 자연스러운 수면까지도 통제하려는 어른들의 강박이 느껴진다고 하면, 저의 지나친 확대해석일까요.
위에 쓴 저의 말들이, 어느 특정 회사를 비난하려는 의도로 읽히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광고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어떤 무의식적 가정들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나의 사례로 들었다는 게 더 맞겠습니다. (아, 그리고 엄마라고 쓴 말들은 모두 아빠로도 대치 가능합니다)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멀지 않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인데, 그 세계에서는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지만,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류가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거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태어났던 아이가 사춘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중요한 뉴스가 됩니다. 빅파더와 같은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그곳에서, 어느 저항단체가 임신한 한 흑인 소녀를 보호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 소녀를 뺏기지 않으려는 저항단체와 정부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주인공 남자는 원치 않게 소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듯 음울하고 황폐한 분위기로 일관하던 그 영화에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한참을 쫓기던 소녀가 어느 호텔에서 밤 사이에 출산을 합니다. 남자주인공은 소녀와 아기를 어느 배에 태워 보내야 하고, 그래서 아기를 강보로 감싸 안은 소녀를 부축해서 아침에 호텔을 나옵니다. 아마도 그 소녀를 쫓아온 듯한 군인들이 그 앞에 포진해 있었는데, 소녀가 아기를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군인들이 길을 열어줍니다. 그중 몇몇은 경배하듯 그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합니다. 마치 '아기 예수'를 맞이하듯이 말이죠.
어쩌면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아기들이 '아기 예수'와 같은 존재라고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걸까 싶네요. 그리고 마치 아기 예수를 맞듯이 소중하고 가치 있게 그 아기들을 대하는 것이, 먼저 이 세상에 도착한 우리들의 임무이겠지요. 아기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성탄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