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의 태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얼마 전에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년, 감독 션 베이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주인공은 6~7살 정도 되는 '무니'라는 소녀인데, 엄마랑 디즈니랜드 근처의 모텔을 임시거처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영화는 모텔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무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줍니다. 영화에 대한 소개나 줄거리는 인터넷에도 많이 올라와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안 보신 분들께는 권해드리고 싶네요. 연령이나 성별, 취향에 관계없이 어느 누가 보아도 좋을, 잘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좋았습니다.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장면 없이도, ‘무니’의 가슴 아픈 처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 물론 영화에서 ‘무니’는 (맨 마지막 장면만 빼고는) 슬프거나 기죽은 기색을 보이는 일도 없고, 친구들이며 엄마랑 조잘조잘 떠들고 장난치고 먹고 뛰어다닙니다. 오히려 이악스러운 악동처럼 느껴져서 처음에는 얄미울 정도죠.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무니’가 실은 얼마나 돌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지, 바라보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이후에 어느 평론가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좀 더 명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태도와 상담자로서의 태도가 연결이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어요.
- 손쉬운 분노에 호소하지 않는 영화
때로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기 힘들 정도의 사연들도 나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착취적이고 나쁜 아버지가 있을 수 있는지, 무슨 엄마는 그렇게도 무능하고 냉담하기까지 한지, 듣고 있으면 어느 때는 제가 더 화가 납니다.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죠. 하지만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내담자가 겪었을 고통이나 외로움에는 공감하면서도, 내담자를 그런 처지로 내몬 (것처럼 들리는) 부모님을 비난하는 건 조심해야 됩니다. 순간적인 기분에 휩싸여 상담자가 내담자와 함께 신나게 부모님 흉이라도 보게 된다면, 내담자는 돌아서서 수치감을 느끼고, 상담자와 공모하여 부모를 욕보였다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테니까요. 누군가를 악당으로 만들어서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내담자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 빈곤을 구경거리로 삼지 않는 정직한 영화
세상 사람들은 서로 비슷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각기 얼마나 다르게 사는지... 내담자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사연들을 상담실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담자들의 사연에 때로 상담자가 압도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야 당연히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는 상황이 되는 거죠. 이럴 때 내담자의 사연은 어쩌면 잠시 구경거리처럼 전시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는 상담자가 나빠서도 아니고 의도하는 바도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상담자도 압도되고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음을 빨리 알아차리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런 상황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책에서 많이 읽었던 비온의 ‘담아주기’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순간입니다. 내담자를 담아줄 수 있는 상담자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럴 때 드러나는 거겠죠. 이런 능력을 어떻게 키우느냐구요? 글쎄요....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 세상을 구하는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 영화
아, 얼마나 많은 내담자들이 상담자에게 와서 해법을 구하는지요. 그리고 그보다 얼마나 자주 상담자는 그런 해법을 제시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거나, 혹은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자기도 모르게) 품는지요. 상담자로서 내가 얼마나 유능하고 좋은 사람인지 내담자를 통해 확인받고 싶은 욕망은, 끊임없이 점검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슈퍼바이저로부터 가끔 듣는 말들이 있어요. “.... 그런데, 상담자가 그걸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내담자가 그걸 깨닫고 알아야 되는 거잖아요.”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담자를 어린아이처럼 가르치신 건가요.”
에고, 이런 말을 듣는 날은 잠시 마음이 주저앉습니다. ‘내가 또 그랬구나’ 싶으면서 부끄럽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상담자로 훈련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많은 지식을 쌓고 숙련된 테크닉을 습득하는 것이라기보다 어떠한 태도나 자세를 지니도록 애쓰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