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내가 과연 ‘나’일까?
내가 생각하는 내가 과연 ‘나’일까?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만나거나, 내가 내담자가 되어 카우치에 누울 때 간혹 떠오르는 질문이다.
이솝우화 하나.
숲 속에 사는 새들이 가장 아름다운 새를 자기들의 왕으로 뽑기로 했다.
자신의 모습이 검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한 까마귀는 다른 새들의 예쁜 깃털들을 주워 모아 자기 몸을 단장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까마귀가 왕으로 뽑혔다.
너무 기쁜 나머지 까악하고 울자, 다른 새들이 놀라 달려들어 자기 털을 찾아간다.
그 까마귀는 과거보다 더 흉해졌다.
덕지덕지 남의 깃털을 꽂고는 ‘나’인척 살아간다. ‘나’라는 사람을 멋대로 포장하고, 때론 멋대로 왜곡하고는 그게 ‘나’인양 살아간다. 남이 가진 게 부럽다고, 진짜 얼굴은 까마귀처럼 흉하다고, 별로 보잘 것이 없다고 가면을 쓴다. 착한 척, 멋있는 척, 때론 못난이인 척. 자신의 진가를 모르고 생각의 덫에 걸려든다. 가면만 쓰는 게 아니라 상처가 너무 아프다고 다시는 아프지 않으리라 갑옷을 입는다. 그리고는 내가 없어진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 우기며,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내가 과연 사실일까?
어, 아닐 수도 있잖아.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느라, 갑옷을 입고 있느라, 내 진실을 모르잖아. 어쩌면 그 가면 뒤에 있는 나는 내 생각보다 썩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화려한 남의 깃털 뒤에, 거짓 가면 뒤에, 수수하고 맑은 얼굴이 있을 수 있잖아.
내 안에 부족한 것도 있지만 좋은 것도 있잖아. 내가 실수도 했지만 잘 해낸 것도 많잖아.
어려웠지만 견디며 살아가고 있잖아.
넘어지면 일어나면 되고, 마음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면 되잖아. 내가 나를 달래면 되잖아, 잘 해냈다고 내 어깨를 내가 툭툭 쳐주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주면 되잖아.
A씨는 여러 면에서 참 사랑스러운 내담자이다.
상담시간 50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자신에게 집중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나, 때론 침묵하면서 감정을 끌어내고,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이해해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맡은 일이 있으면 며칠 밤을 꼬박 세울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A씨는 상담자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람들 앞에 있는 자신 모습이 어색하고 자신이 없다.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굼떠서 주변에서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이라 여길까봐 무섭다.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고,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고 걱정한다. 밤 세워 일하는 것은 일을 못해서 그렇단다. 좋은 성과를 거두고 다들 잘했다고 인정해도, 돌아서서 빈말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만약 실수를 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일 인양 자책한다.
A씨는 나는 못하는 사람이라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 가면이 필요했는지,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이야기 나누고 같이 아파하면 조금씩 알아갈 것이고,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데는 기쁘기도 하지만, 아픈 일이기도 하다. 아파서 구석구석 숨겨놓았던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 녹록치 않다. 하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않고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일은 더 아픈 일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글에 이 대사를 꼭 쓰고 싶었다.
“저는 어머니 뜻대로 분칠하시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르고, 근 50 평생을 살아왔잖아요!" "어머니랑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아 왔다고요! 언제까지 껍데기만 포장하며 사실 건데요! 언제까지 남들 시선에 매달리며 사실 거냐고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