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친한 선배의 고향에 같이 간 적이 있습니다. 수안보 옆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근처 사람들은 시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괴산평야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부자마을로 불렸다고 합니다. 문경새재 입구에 있기 때문에 주위의 높은 산봉우리가 인상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마을 옆 아담한 잔디밭 위에 서 있는 커다란 십자가 너머로 뭉클하게 아름다운 저녁놀을 바라보았을 때, 신을 믿지 않는 나도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경남지역으로 사진촬영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옛 기억이 떠올라 고속도로를 빠져나갔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각색되고 왜곡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을 하지만 그 옛날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중에 하나 둘 끼어넣어 편집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의 기억도 그런 것이었을까요?
37년 만에 다시 찾은 연풍성지에는 거대한 건축물과 많은 가설천막 사이에 상대적으로 작아진 십자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과 잘 관리된 정원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맘 속이 성스러움이 아닌 이기심이 가득한 탓일 것입니다. 고향 마을 여기저기에 커다란 공장건물이 있는 것을 싫어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