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신당동
조선은 1395년 서울에 성벽을 세우고 한성부를 두어 다스렸다. 도성을 둘러싼 ‘성저’도 십 리 밖까지 한성부가 관리했다. 성안 사람은 죽어서 광희문을 나와 청구에 묻혔다. 문밖에는 죽은 이를 달래고 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어서 사람들은 청구 주변을 ‘신당’이라 불렀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도성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고 성저십리에 구를 넷 만들었다. 이때 신당동을 왕십리와 엮어 ‘성동구’로 했다. 도적이 들끓는 버티고개는 성동구와 용산구를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75년 신당동을 ‘중구’로 옮겨 묶었다. 도성과 성저를 가르던 광희문 성벽은 퇴계로에 흔적으로만 남았고, 청구 고갯길은 새로운 경계가 되었다.
한성부 성저가, 경성부가, 성동구가 그리고 중구가 된 신당동은 서울과 서울이 아닌 곳,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였다. 이제 광희문으로 상여가 나오지 않고, 버티고개에 도적이 없으며, 이웃 왕십리는 마음속에서 멀어졌다. 버티고개에서 한남동을, 청구 너머로 성동구를 바라보면 안녕히 가시라는 표지판과 구청에 따라 모양도 다른 가로등에서 어렴풋이 경계를 느낀다. 유턴하는 한여름날 중구 물청소차는 경계를 확인하듯 물 자국을 남기지만 어느새 말라 사라진다. 구석으로 옮겨간 광희문은 한가한 유적이 되었지만, 버티고개 너머 남산은 아직도 높고, 아스팔트 위 화살표는 경계를 넘지 말라고 굳세게 말한다. 하지만 어느 관청이 관리하던,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경계를 넘나들고 누구도 경계를 말하지 않는다.
* 2019년 2월, ‘서울, 오늘을 찍다 展’ (SeMA벙커) 에서 전시한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