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우먼콤플렉스의 종언
슈퍼우먼콤플렉스의 종언- 제목은 조금 거창한 느낌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최근에 제가 고민했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젊은 세대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조심조심 하게 되고 뭔가 마음이 불편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도 20대 페미니즘을 공부했고 나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왜 불편한 것일까? 우리 때(1980년대 20대를 보냈습니다) 페미니즘과 다른 건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저가 느끼는 당혹감 혹은 불편함의 예를들어보면.. 한 젊은 친구가 이야기 합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평가에서 남녀가 불공평한 거 같아 속상하다”
이에 대해 저는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받았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최소한 서너 배 이상 노력해야하는 것 같아요”
이 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잠깐 생각해보시겠어요.
그 젊은 친구의 답변입니다.
“제가 왜 그래야하나요?(남성보다 서 너 배 노력 하는 것)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그런 말들이 저희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아세요? ‘너희는 왜 열심히 하지 않고 불평하느냐...’라는 의미로 들리거든요.”
또 한 예를 들면.. 제 연배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예전에 남성들이 음담패설을 농담으로 알고 정말 많이 했습니다. 성폭력, 성희롱 대처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 조언삼아 제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운운하며(실제 표현은 원색적이었겠죠) 그런 말을 담는 남성보다 더 세게 이야기하는 거다. 그러면 다시는 내 앞에서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지 않더라.”
저의 젊은 시절 대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젊은 친구는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화는 나지만 꾹꾹 누르는 듯이 말했습니다.
“제가 왜 그들과 같이 폭력적이 되어야하죠? 그런 말씀은 성폭력, 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네가 약해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너 잘못이야..’라고 하는 이야기나 다름없거든요.”
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제 경험, 제 생각에서 나온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나의 20대로부터 지금까지 지난 40여년 무엇이 달라진 걸까?
간단히 한 예를 짚어보겠습니다. 저는 1981년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제가 다닌 정경대 전체 학생수가 400여명이었는데 그중 여학생은 17명이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들어왔다고 난리였죠. 정외과와 경제학과는 여학생이 1명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더 많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수적인 변화에 불과한 것일까요?
저희 세대 여성들은 결혼과 일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고(대개 결혼과 가정을 택했지요), 일하는 여성들은 ‘그래서 여자는 안 된다니까‘, ’여자들은 어쩔 수 없어’...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얼마나 벌겠다고...’, ‘아이들 교육이나 제대로 하지..’.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서 가정과 직장에서 네 배, 다섯 배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세대 보다 앞선 세대 여성들은 더 높은 장애를 넘으셨겠지요. 전통적인 여성의 벽을 넘는 이들에게 붙인 신드롬이 있었습니다. 슈퍼우먼 콤플렉스. 남성중심주의적인 가부장제의 가치와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자아성취의 이름으로, 소녀가장 혹은 아줌마 가장의 이름으로 감내해야했던 여성들의 치열한 삶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지난 40년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최근 제가 불편하게 느꼈던 젊은 여성 세대들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저희가 왜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가져야 하나요?”
“슈퍼우먼? 가능해요? 그거 자기학대 아닌가요?”
“우리는 그런 콤플렉스 갖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또 하나. 그 근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전통적인 관념으로 여성들에게 덧씌웠던 사회적인 슈퍼우먼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겠어요.
언제부터 우리가 어르신 돌봄, 출산과 육아문제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면서 고민했을까요? 과거에는 왜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과거에는 문제가 안됐지요. 가정에서 여성 한명만 희생하면 되었으니까요. 현재 사회복지 차원에서 행해지는 엄청난 국가예산은 ‘과거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들의 역할(어머니, 며느리, 아내)의 일부를 사회적 가치로 환원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기성세대들의 생각, 정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덧씌워진 사회적 슈퍼우먼콤플렉스는 종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헌신적인 자기희생이란 이름으로 성적불평등을 감내했던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체화된 기성세대들에게 요즘 젊은 세대들의 성평등 목소리가 불편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저 자신도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던 20대 말에서 50대 초반까지의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 불편한 마음의 정체를 알기위해 고민했으니까요. 기성세대 많은 남성들은 과거 농담처럼 했던 음담패설이 성희롱이 되고, 성역할, 사회화된 성(여성성, 남성성), 성에 대한 표현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의 붕괴, 상식의 배반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흔히 이야기 하듯 “ 말도 못하겠어, 요즘 아이들 너무나 달라, 표현이 심하잖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어쩌라고..식으로 넘겨도 되는 문제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 젊은 세대들의 성평등 논의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 ‘좋고 싫음의 정서적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불편한 심정으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대들과 동시대인으로 호흡 하며 살 것인가’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문제로 느껴졌습니다. 레드콤플렉스에 갇힌 분들을 마주하며 나 자신 미래의 거울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페미니즘은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기 전에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으로 먼저 구별하고,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또 구별하면서 재생산해온 남성중심의 불평등의 역사를, 남성중심으로 만들어온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뿌리 깊은 정서를 성평등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참 인간다운 세상을 향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자는 목소리입니다.
슈퍼우먼 콤플렉스의 종언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남성중심의 사회정치권력구조, 가부장적 문화와 가치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 여정은 앞으로도 많은 불편할 것들과 마주하는 길일 것입니다.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갈 길은 어느 방향일까요? 차별 없는 세상, 인간해방의 길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