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유발 하바리(2017)
『사피엔스』로 히트한 유발 하라리가 바로 이어서 『호모 데우스』를 썼다. 역사학자답게 인간의 역사를 기록했는데 시각이 아주 독특하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반해, 그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도 ‘미래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아서, 미래도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내가 신의 눈으로 이 지구와 인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호모 데우스』에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는 지난 수세기 동안의 난제(難題)였던 기아, 역병, 전쟁의 문제를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늙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이나 테러범이나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다. 이제는 보통사람이 가뭄, 에볼라,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죽기보다는 맥도날드 같은 곳에서 폭식해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기아, 역병, 전쟁 같은 오랜 난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인류에게 이제 무엇이 최상위 의제로 떠오를까? 지속적인 경제성장, 빈부격차,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생태계 위기? 물론 이런 것들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의 대답은 아주 엉뚱하다. 인류의 새로운 의제는 인류가 신(神)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란다. 인류는‘호모 사피엔스’에서 자신을‘호모 데우스’로 바꿔가고 있단다. 그는 인류의 다음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라고 확실하게 말한다. 이 세 단어는 많은 것을 함축하지만, 과감하게 요약하면 불멸은 생명 연장을, 행복은 유쾌한 기분을, 신성은 초능력을 의미한다.
그런 조짐이 있긴 하다. 첫째, 인류는 유전공학, 재생의학, 나노기술 같은 분야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질병을 치료하고 노화를 방지하고 신체의 성능을 높임으로써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인류의 수명이 150세 정도로 늘어난다면 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40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다 해도 결혼생활이 110년이다.‘정년퇴임’은 구시대의 언어가 되어 버리고, 120세에도 뭔가를 배우면서 자기계발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기분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즘과 짜릿한 승리(게임, 스포츠)를 즐기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각적 쾌락은 얼마 못 간다. 대안으로 인간의 생화학적 기제를 조작하여 행복한 기분을 이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쉽지 않고 윤리적인 검토도 필요한 대안이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셋째,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비(非)유기체 합성. 이런 공학과 기술을 활용하면 생각의 힘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고, 전기헬멧을 쓰고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과 직장의 전자기기를 원격조정하고, 비유기적인 인공지능을 통해 지구 바깥의 어느 우주공간에서 일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처럼.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보여준 인류는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주 위험한 존재로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하면서 매머드를 비롯한 수많은 종을 멸종시켰다. 인류는 최초의 금속 도구를 만들기 전에 이미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대형 동물의 90%, 아메리카에 살던 대형 포유류의 75%, 지구의 모든 대형 육상 포유류의 약 50%를 멸종으로 내몰았다.
이어진 농업혁명의 부산물은 생태계의 교란이다. 농업혁명은 대량 멸종과 함께 ‘가축’이라는 새로운 생물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지금은 대형동물의 90%가 가축화되었다. 농업혁명은 수렵인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삶을 일정 범위의 땅 안에 붙들어 놓았고, 인류를 조직하고 관리할 줄 아는 소수의 지배자에게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지배되는 삶을 일상화시켰다.
그런 흐름은 산업혁명을 지나서도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먼저 힘을 얻은 유럽인들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대륙의 전부, 즉 아프리카와 남북아메리카와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대륙을 점령하고 착취한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인류라는 종의 특성이 그처럼 조직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뜻이다.
인류는 수많은 착취와 전쟁과 혁명을 거치면서 ‘평화’의 의미를 새로 배우고 있다. 전쟁 부재 상태의 평화에서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의 평화로 말이다. 그러나 약간의 교양이라도 갖춘 사람은 그것이 평화의 진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가 구현된 상태이다. 부연하면, 평화는 인류가 갈등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희망을 개인의 차원에서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제시한 불멸, 행복, 신성은 개인 차원에서 도달하고픈 욕망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다. 그래서 그 희망은 언제든지 재앙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인류의 희망을 개인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의 차원에서 찾는 방식으로. 그러면 인류가 구현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가 평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연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을 가진 인류가 ‘관계적이고 평화로운’ 인류로 진화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