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의 책 소개 : 화살시편 | 김형영 저 | 문학과지성사
L형,
이제 낭만의 시대는 다시 오지 못할 것 같소. 낭만이란 생활의 양식이고 그 기저에는 말(言語)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오. 말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 형식에서 격(格)이 그 내용에서 품위(品位)가 드러나며 틈새를 메우고 있는 어감에서 다양한 변주가 일어나는 교향악과 같은 것이오. 그리움이 발효되어 감성적 효용을 가질 때 낭만을 말할 수 있는데, 바로 그 교향악과 같은 말의 향기가 효모라는 게 내 지론인 것은 형도 잘 알거외다. 허나 요즈음 수많은 디지털 기기 속에서 생성되고 소비되는 말들을 보고 있자니, 말의 종말을 보고 있는 듯 하오. 근본도 없이 내뱉어지고 이유도 모른 채 독기 오른 비난의 화살이 되기도 하는, 윤기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이 말라비틀어진 말들의 시체들 속에서 낭만을 운운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오늘 한 권의 시집에 대해 말하려 하오. 언어의 정수요, 사유의 곳간이랄 수 있는 한 편의 시야말로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낭만의 유지(遺址)가 아니겠소.
오늘 내 손에 들려 있는 시집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김형영 시인의 마지막 시집 『화살시편』이오. 그의 초기 시에서 보여 준 강렬한 이미지와 시퍼렇게 날 선 언어와는 달리 부드러운 직관과 자연에의 합일, 그리고 성서적 상상력에 기반한 영성의 언어가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드리워지오.
어깨동무 내 동무
청진동 뒷골목
한잔 술에 취해
고래고래 떠들던
인호야,
하늘에도 뒷골목 있니?
열차집 낙지집도 있니?
인호야, 성베드로야
- 「화살시편9 – 최인호」 전문
먼저 세상을 떠난 소설가 최인호의 이름을 부르는 마지막 행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게 있소이다. 친구를 향한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의 파도 말이오.
이처럼 시집 『화살시편』에는 그리운 친구들을 호명하는 시들이 여럿 보이오. 김현, 김치수, 이청준 등 저쪽 세상의 친구들이며, 정현종, 윤후명과 같은 아직 이쪽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공초 오상순 같은 선배들까지. 그 인간관계의 층위에서 보이는 따뜻한 언어는 얼핏 단조로운 한 순간의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시인이 많은 예술가들과의 교유 속에서 솎아낸 삶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하늘 위의
하늘 위의 하늘 위의
하늘 위의 하늘은
주님의 집인데…… 형
어느새 거기 가 계시오.
눈에는 안 보여도
있다고 믿는 거기……
저 하늘 위의
하늘 위의 하늘 위의
하늘 위는 멀기는 해도
눈앞에 어른거리듯
마음이 가닿는 곳.
- 「하늘 위 – 김치수 형을 그리며」 전문
‘눈에는 안 보여도 / 있다고 믿는 거기’에 시인의 ‘마음이 가닿’고 있소. 그곳에 영혼을 주고받던 친구가 가 있기 때문이오. 흔히 예술가의 우정을 일컬어 ‘두 개의 몸, 하나의 영혼’이라 하지 않소? 도대체 뜨거운 그리움이 없다면 우리 인생을 어찌 살찌울 것이며 간절한 기도가 가능하겠소. 그러나 이승을 떠나 다신 육신을 마주할 길이 없는 친구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는 오히려 단순하오. 감정이 승하면 오히려 차분해 지는 법. 함의는 지극하나 표현은 절제되니 읽는 이는 더 애가 타오.
이 시집의 3부는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화살시편」연작시 모음인데 간결하고 직관적인 시편들 인지라 마치 선사들의 게송을 보는 듯 하오. 그런데 알고보니 카톨릭의 기도법 가운데 ‘화살기도’라는 게 있습디다. 라틴어 oratio jaculatoria라는데 카톨릭대사전에 ‘아무 때나 순간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매달리듯 그때그때 느껴지는 정(情)과 원의(願意)대로 간단하게 바치는 기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직관과 즉흥성으로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드리는 기도라 여겨지오. 아마 시인이 화살기도를 드리는 심정으로 이 연작시를 썼으리라는 짐작도 무리는 아닐거외다.
헛것에 홀려
떠돌다
떠돌다 넘어져
돌아보니
아이쿠머니나,
천지사방이 여기였구나
평생이 이 순간이구나
- 「화살시편 10 - 돌아보니」 전문
‘이 순간’이 돈오(頓悟)의 찰라이며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보는 시간 아니겠소. 카이로스의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오. 평생을 두고 얻고자 했던 것이 ‘떠돌다 넘어져 / 돌아보니’ 보인 거요. 이것은 우연히 보인 게 아닐 거외다. 오랜 시간의 사유와 고뇌가 응축되다 응축되다 마침내 폭발하는 그 순간을 맞는 게지요.
한 번만 더
못 박히소서
내 잘못 내가 모르오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못 박히소서
주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
내 대신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못 박히소서
아멘,
- 「화살시편18 -아멘」 전문
얼핏 불경스러워 보이는 이 시는 화살기도에 곧장 다가가 있소. 이 시의 핵심어는 ‘나 대신 못 박히소서’ 가 아니라 바로 위 8행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오니’이오. 화자는 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 던져 넣고 있는 거지요. ‘한 번만 더 / 한 번만 더 / 못 박히소서’하는 절규는 어거지로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의 몸과 하나 된 화자의 투신(投身)이 아니겠소. 이 시의 마지막 행 ‘아멘’은 마침표로 종결되지 않고 쉼표를 찍고 있소. 지속될 수밖에 없는 기도인 것이오. 돈오와 카이로스의 순간을 맞았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분께 의지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오.
「오후3시에」라는 시는 방에 날아 든 하루살이 한 마리를 무의식적 조건 반사 신경이 작동하면서 ‘무심한 내 손은 눈 깜짝 사이 / 그의 전 생애를 앗아버렸다’고 진술하고 그 시간이 ‘오후 3시’였음을 상기 하면서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소.
그의 영혼
나의 영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의 영혼의 무게
초신성만 할지 모르는데,
그의 영혼의 눈
태평양만큼 눈물이 고여 있을지 모르는데,
그의 영혼의 가슴
은하수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데,
내 꿈과 같은 꿈을
그도 꾸고 있을지 모르는데.
낮도 밤도 아닌 오후 3시에,
하루살이여
어디까지 보고 떠났느냐.
너 없는 천지사방은 침묵만이 감돌고 있다.
정녕 이것이 네가 바라던 그 시간이었더냐.
- 「오후3시에」 일부
화자의 종교적 깨달음은 교리적 경계를 허물고 미물 하루살이를 통해 존재의 무게를 계량하고 있소. ‘전 생애라야 하루뿐’이고 ‘소리도 내지 못하는 작은 날개’를 가진 하루살이지만 ‘초신성’ ‘태평양’ ‘은하수’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진술은 생명에의 경외를 일깨우기 충분하며, 창조주가 ‘보기에 좋았다’며 흡족해한 창조세계 곧 자연에의 찬가라 할 거외다. 여기서 곤충에 불과한 하루살이의 영혼 운운하는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배치된다는 속 좁은 해석은 무의미 하오. 인간이 비록 창조주의 최후의 창조물이긴 해도 결국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소. 화자는 하루살이의 죽음이 일어난 시간을 ‘오후 3시’로 특정함으로써 예수의 죽음과 오버랩시켜 피조물의 존재의 무게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보여지오.
세상을 흔드는 봄바람에
만물은 꿈꾸기에 바쁘다.
바람이 불면
꾸다 만 꿈 깨어나
산과 들을 쏘다니다가
눈 깜짝할 사이
입김을 풀어
한꺼번에 꽃피우고는
제멋에 취해
제 향기에 취해
봄바람 품어 안고
모두 어디로 떠나려나.
하느님도 몸을 푸는
봄이 일어서는 날.
- 「제멋에 취해」 전문
시인의 영성은 제도로서의 종교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피조물 즉 자연에로 확장되고 있소. 본래 영성이란 그 한계를 구획하지 않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에게서 해방하는 것일지 모르겠소. 시 「제멋에 취해」는 겨우내 숨 죽이고 있던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을 ‘하느님도 몸을 푸는 / 봄이 일어서는 날’로 노래하고 있소. ‘봄이 일어서는’ 것은 생명활동 곧 창조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소. 그것은 ‘입김을 풀어 / 한꺼번에 꽃피우고는’이라는 시어가 주는 말의 정황과 관련이 있소. ‘입김을 풀어’는 거듭되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말하며 ‘봄바람’은 히브리어 루아흐(숨, 혼)일 것이오. 잘 아다시피 성서 창세기에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는 구절이 있소. 고작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던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는 것은 단지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역에 동행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이오.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 「그래도 봄을 믿어봐」 전문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던 인간은 기고만장해져서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자연을 훼손하더니, ‘보기에 좋았던’ 지구를 디스토피아로 만들고 말았소. 이 시 「그래도 봄을 믿어봐」에는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혹독한 현실을 나열하며 도무지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지경의 탄식이 가득하오. 그런데도 그런 진술의 끝머리에 툭 던진 한마디가 ‘그래도 봄을 믿어봐’라니…… 절망의 언어들 속에 근거 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문학의 진부함인가? 아니오. 화자의 희망은 시인의 영성에 기대고 있소. 시인은 창조 사역에 동행하도록 불리워진 인간에게 봄을 믿는 것에서 그치는 수동태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봄을 믿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는 것이오.
빈 절터
쑥대밭
거기서도 꿈은 자라고 있구나
- 「화살시편22 -꿈이 자라는 곳」 전문
시인은 쑥대밭에서 자라고 있는 꿈을 보고 있소. 그것은 그에게 자연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모습이기 때문이오. 한처음 천지를 지으신 그분의 숨결이 거기 있기 때문이오.
내가 죽거든
내 눈 두껑은 열어둬.
관악산 문상을 받고 싶어.
아침마다 걷던 숲길이며
수억만 년 묵상 중인 바위들,
새들의 만가,
춤추는 나무들,
내가 죽거든
관 뚜껑을 열어둬.
용약하는 관악산의 내 친구들
마음에 담아 떠나고 싶어.
- 「내가 죽거든」 전문
시인은 이미 자연과 하나외다. 세상을 떠나는 그날에도 그가 기꺼이 문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관악산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친구들이오. 이런 절창을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 경지는 아무나 이를 것이 아닌 건 확실하오. 어느 누가 관악산의 ‘숲길’ ‘바위’ ‘새들’ 그리고 ‘나무들’의 문상을 받겠다고 ‘눈뚜껑’ ‘관뚜껑’을 열어두라 유언을 할 것이오. 돈오(頓悟)와 카이로스를 경험하지 않고서야, 영성이 충일한 상태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경지를 볼 것이오.
L형,
형도 아다시피 산문이 지난한 사유의 직조물이라면, 시는 직관과 절제의 크로키 같은 것이오. 흔히 ‘직관’이라는 것을 사유의 과정을 생략한 채 뜬금없는 번개를 맞듯 오는 거라 오해하는 경우를 보오. 아, 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절차탁마 없이 어찌 한물건을 얻을 수 있겠소. 김형영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에서 시 쓰는 일을 ‘영혼을 파먹는’ 작업이라 진술하고 있소. 그런데 ‘50년을 파먹었는데 / 아직도 허기가 진다’하니 그 작업의 고단함을 짐작할 수 있지 않소? 그럼에도 시를 직관의 산물이라 하는 것은 절제된 언어와 그 속에 담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응축된 사유의 흔적을 보기 때문일 것이오.
시인 김형영의 마지막 시집이 된 『화살시편』은 시인이 생애의 끝자락에서 길어 올린 벗들과 신과 자연에 대한 헌사이며, 그 자신과 독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언어일 것이오. 육신의 한계와 정신의 구속을 벗어던진 그의 직관과 절제의 언어가 주는 품격과 아름다움에 모처럼 행복했소.
소위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지구에 가혹한 학대를 하였고, 지금 자연의 냉정한 앙갚음을 당하고 있소. 전 지구적 이상기후로 여러 나라가 어려움 속에 있고, 우리도 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전히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나비가 저 죽을 줄 모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으로 전염병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소. 부디 건강하시고 붓을 쥔 손에 힘이 더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