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고린도전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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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사 아미니.......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게 체포된 학생 아미니가 사망한 2022년 9월 16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란은 ‘히잡’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관습과 인권적 가치가 거세게 충돌하고 있다. 경찰은 잡아서 가두기만 했는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가히 이란 판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아미니 의문사에 대해, 이란 전역에서 진상규명 촉구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11월 25일 현재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시민이 공식 집계만 자그마치 3백 명을 넘어서고 있기도 하다. 신앙, 유구한 전통 다 좋다. 하지만 그 어떤 가치라 하더라도 생명보다 소중할까? 더욱이 그걸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권력이 시민을 살상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이미 악하다. 닥터 김사부가 수칙이고 뭐고 무조건 사람 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던가! 바라건대 그 땅에 더 이상 머리에 무엇을 쓸지 말지는 패션계나 개인의 취향이 판단하는 시대가 속히 오길 바란다.
그런데 위의 첫 단락을 쓰고 나니 필자는 이런 평을 낼 자격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개신교 신앙인인 필자는 약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 발가락을 담그고 있는 자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는 어떠했는가? 유럽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한 바울의 문헌에서 여성에게 히잡과도 같은 너울 착용을 종교적 이유를 들어 요구하지 않았는가? 또 오랜 시간 ‘여자에게 영혼이 있는가?’라는 어이없는 논의를 공의회에서 이어갔고, 교회의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들에게 마녀라는 굴레를 씌워 죽음을 몰아가지 않았는가? 지금은 어떤가? 세계 가톨릭에서 여전히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고, 한국의 주류 개신교단 역시 목사와 장로 안수를 불허하고 있지 않은가?
이 같은 교회의 일원인 내가 감히 이웃종교의 같은 폭력에 대해 짐짓 거들먹거리며 훈수 두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세 번째로 소개할 책, “한국 근대 기독교와 여성의 탄생” (이숙진 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2)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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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반에 대한 폭넓고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작은 존재들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유의미한 연구를 진행해 왔던 이숙진(이하, 저자)의 2022년 신작인 이 책은 한반도의 개신교 유입 초기 상황에 대해 여성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는 수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 통상의 교회사적 평가는 귀츨라프, 언더우드와 같은 남성 선교사의 활동과 서상륜 등의 성서 번역, 이후 배출된 조선인 남성 목사와 신학자 등 남성-선교사-교역자 중심적 한계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진일보한 흐름 속에서 여성 전도인들이 더러 조명되기는 했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이 책은 초기교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구성했던 여성 교인들 뿐 아니라, 학습과 자기성찰을 통해 해외에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던 박인덕 등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과 그 족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진남포의 그 아이뿐만 아니라, 제물포, 군산, 진주, 소래 등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서 이름도 없이 천대받던 계집들이 한글과 바이블을 가르치던 예배당과 미션여학교를 거쳐 ‘말하는 주체(speaking subject)’로 우뚝 섰다. (책 7쪽)
저자는 이 같은 고찰을 통해 당대 한반도에 전래된 신종교이자 신문물이었던 개신교가 조선이라는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었고, 그 선두에서 몸부림치며 변화를 일궈간 여성, 이 땅의 근대를 열어간 이들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물론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관점에 따라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근대여성 연구는 늘 부분적일 뿐만 아니라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 시선으로 보면 기독교 신여성은 가부장적 윤리규범을 위반한 발칙한 계집이지만 민족주의 렌즈에서는 민족운동가 아니면 변절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책 10쪽)
인간으로, 더욱이 말하는 인간으로 거의 유일하게 대접받는 공간이었던 교회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가운데 황국신민화에 동원되었고, 그에 속한 여성들의 언어 역시 그에 편승하게 되었음을 안타깝게 고찰한다. 아울러 가부장적 덕목 및 제도와 공모하는 특성을 보였던 여성들의 신앙 간증과 기독교계 여학교 교육, 많은 경우 성서근본주의의 넘어서지 못했던 여성 신도일반의 상황 등 당대의 한계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과 관습을 통해 여성의 발화 자체를 불온시하고 통제대상으로 삼았던 유교적 지배질서에 파열음을 내고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을 추동했던 당대 교회여성들의 활동은 다음의 시간을 열어내는 주요 기폭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 시기 많은 교회여성들은 유교적 히잡을 벗어던지고 ‘여성’임을 당당히 선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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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엘 바흐는 명저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주창했다. 이는 신학의 자리가 저 하늘이 아니라 인간 삶의 현장이라는 선언임과 동시에 사건 속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느)님의 현현 역시 역사의 한 중간에서 펼쳐진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여 년 전 이 땅에서 새롭게 접한 개신교신앙을 통해 해방과 삶의 에너지를 발견한 여성들의 여정은 다만 어떤 사람들의 흔적일 뿐 아니라 삶의 자리에 현현하신 하나(느)님의 발자국이기도 할 것이다. 그 신의 족적은 특정 종교, 계급, 성별, 성정체성, 출신, 사회적 위치, 연령 등에 제한받지 않는 사회로 이어져 있다. 또 해방된 자유인들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권을 마음껏 누리는 세상을 향해 있다. 그 같은 세상에서는 적어도 여성이기 때문에 교역자가 될 수 없거나, 공권력이 보기에 머리를 깊숙이 감추지 않은 것이 죄가 되어 구금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난 시간에 대한 고찰임과 동시에 다가올 시간을 어떤 생각과 실천을 통해 맞이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한국근대교회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관심이 있는 분들, 교회 일반에 대한 여성주의적 평가를 살펴보기 바라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대림절과 성탄절이 있는 연말은 기독교서적 읽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