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지음 | 2023 | <가족각본>, 창비
가족이 각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짜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매우 정교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가족 구성원들이 역할이 맡고 있다는 생각. 내가 결혼할 때 그런 생각을 잠시 했는데, 딸이 결혼할 때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관계가 전보다 복잡해져서 그랬다. 그렇지만 가족각본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가족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사는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가족 내에서 역할을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성소수자' 혹은 '퀴어'(queer)라 불리는 인물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기존의 가족각본에 심각한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족이라는 무대에 등장하면서 당연하게 여겨져 오던 역할이 꼬이게 되었다. 저자는 동성결혼 반대 시위를 예로 든다. 2022년 4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던 활동가들이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할 때, 그 옆에서 시위하던 동성결혼 반대 피켓 행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를 동성애자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남자가 며느리? 여자가 사위?", "동성애 합법화로 가정을 파괴하려는 건강가정기본법개정안 절대반대" 등이 그것이다. 구호들 중에서 압권은 "며느리가 남자라니!"였다. 동성결혼을 반대하는데 '며느리'를 등장시킨 것이 생뚱맞지만,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공감을 노린 전략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성소수자 이슈가 만들어내는 균열을 쫓아 한국의 가족제도를 추적한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껄끄러운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기존의 가족제도 속에서 성소수자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일 수 있다. 성소수자의 삶과 기존의 가족제도가 충돌한다면, 양쪽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성소수자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가족각본의 구조와 기능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가족각본은 성소수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 만약 가족각본이 성소수자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각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성소수자'와 '가족각본'을 핵심어로 삼아 총 7가지 이야기를 전개한다. 1장은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되는지 이유를 파고든다. 며느리의 역할이 무엇이고, 그 역할이 왜 하필 여성에게 부과되었는지 추적한다. 2장은 동성커플은 출산할 수 없으니 결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분석한다. 결혼과 출산의 공식을 낯설게 본다. 3장은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과 관련하여, 국가가 공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 잔인한 과거를 돌이켜본다. 4장은 동성커플이 키우는 아이는 불행할 것이라고 염려하는 마음을 돌아본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는 관념이 이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시대임을 일깨운다. 5장은 성교육이 가족질서를 유지하는 규율로 작용해 온 문제를 들춰낸다. 6장은 가족각본을 공식화하고 보호하는 법제도를 살펴보고, 한국사회가 애써 지키는 가족각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는다. 마지막 7장은 가족각본을 넘어선 가족과 제도를 상상한다. 성소수자도 행복한 가족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매우 당연한 주장을 바탕에 깔고서.
저자는 이미 2019년에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써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사람들이 특별한 악의를 품지 않고서 무심코 누군가를 차별하는 상황들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저자는 차별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이름을 붙였다. 최근에 쓴 『가족각본』은 '성소수자'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결혼, 출산, 육아, 성교육 등에 대해서도 인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을 통해 아무도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