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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혜의 뉴욕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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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Crepe Myrtle)가 눈에 들어온다

posted Nov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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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와염소.jpg

Sue Cho, “Landscape with Crepe Myrtle”, 2022, Digital Painting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 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나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배롱나무 - 도종환 

 

 

코비드로 한국을 나가지 못하다, 지난여름 4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다. 이제 미국 생활이 거의 40년 되어가는데, 한참 동안은 한국에 간다고 하면, 가기 전의 설렘과 와서의 그리움으로 감정 소모가 힘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한국의 기억을 의식의 서랍 속에 저장하여 미국에 오면 다른 세계 속에 덤덤하게 살게 된다. 그렇게 살금살금 살다가 기억이란 묘해서 하나가 건드려지면 나의 의식에 전혀 없었던 기억들까지 끄집어 올린다. 

 

산책길에 종종 들리는 제퍼슨 마켓 가든(Jefferson Market Garden)은 10월까지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그리니치빌리지의 오아시스 같은 정원이다. 좀처럼 빈 의자를 찾기가 어려워 몇 바퀴를 돌다 배롱나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들어오는 입구 양옆으로 그리고 정원 안에도 두 그루나 있었다. 내가 찾던 배롱나무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고 무수히 스쳐 지나갔는데 알아채지 못했다. 이 배롱나무가 지난 여름 그리고 그 너머의 기억 서랍을 열게 해 준다. 

 

배롱나무3.jpg

 

서울 도착 이튿날 새벽 3시경에 눈이 떠져 그때부터 배가 고팠다. 뉴욕은 저녁 시간인데… 생각보다 아침에 여는 식당이 많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여는 곰탕집 “하동관”을 우연히 찾았다. 평소 곰탕을 좋아하진 않는데 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고 속이 편안한 게 보약같이 느껴졌다. 후에 “음식점 찾다 찾다 식성 까다로운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친구에게 듣고 웃었다. 식당을 열기 전 시간이 남아 근처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구경하려고. 그런데 의외로 나무도 많고 국회 산책로가 걷기 좋았다. 친절하게 나무 이름을 써서 붙인 팻말들을 본다. 소나무, 양 살구나무, 산딸나무, 배롱나무…. 아니 배롱나무? 

 

전에 길목 연재에 실린 “일곱째별의 정원일기”에 낫을 가지고 가시나무 사이에 질식하는 배롱나무를 구출하는 글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나비 날개보다 보다 더 엷은 꽃잎은 촘촘한 레이스처럼 오글오글한” 배롱나무의 꽃은 무얼까 무척 궁금했었다. 아 바로 이 나무를 구출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구나. 이제 그 글에서의 느낌을 오롯이 감지할 수 있어 뿌듯했다. 

 

여의도 배롱나무 3.jpg

 

국회의사당 “사랑재”라 불리는 전통적인 한옥 앞에도 제법 큰 배롱나무가 있는데 석마와 동자석을 배경으로 운치가 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 껍질이 벗겨지고 시내몬 빛깔의 매끈한 줄기를 들어내고 있다. 한여름 7월에 꽃이 피기 시작해서 꽃이 백일을 간다고 백일홍 나무, 목백일홍이라 불리는데 줄여서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꽃잎이 얇은 크레이프 종이 같아 영어 이름은 Crepe Myrtle이다. 한여름 땡볕에 꽃나무가 많지 않을 때 이렇게 화사한 꽃을 백일 동안 보여주다니. 

 

배롱나무를 알고부터는 배롱나무가 어디 가나 보인다. 서울역이 보이는 구름다리 위의 화분 정원이나 주변의 아파트 마당에도 배롱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희한하다. 전혀 나의 기억에 없었던 배롱나무가 의식의 수면에 떠 올랐다. 오래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소쇄원, 백련지 등 남쪽 지방을 갔을 때이다. 식물에 대해 많이 아는 새언니가 가로수에 쭉 나지막하게 피어있던 꽃나무를 보고 목백일홍이라고 했던 장면이 선명하게 사진처럼 기억된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하던 엄마의 모습도 함께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오래전부터 배롱나무를 만났었다. 

 

나무를 안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불러주고, 사계절 모습을 기억하고, 그 나무를 만났을 때 반갑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배롱나무를 알게 되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

늘 다니던 길에 오래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배롱나무 - 도종환

 

까치와 배롱나무.jpg

Sue Cho, “Crepe Myrtle and Mapie”, 2022, Digital Painting

홍영혜-프로필이미지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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