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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저물녘 하늘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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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미끄러지는 말

posted Dec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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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낙영
발행호수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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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갓 오줌풀 우거진 궁벽산촌에 몸을 숨기고 살아 벗들이 일러 부르길 광성자胱荿子라 하거니와, 비록 아름다운 이름은 아니로되 우애를 한껏 담아 준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별호別號삼기로 한 지 오래라. 내가 비록 벽촌의 누거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아닌 바에야 어찌 저자의 사정을 외면하랴. 임인壬寅년 신해辛亥월 을묘乙卯일에 문득 만추의 야음을 즐기고 있을 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환상에 불길한 마음 가눌 길이 없어 천기를 살펴보곤 기겁을 하였던 바라. 아뿔싸! 어찌 독룡毒龍의 흉악지심이 명부冥府의 도까지 어지럽히며 무고한 생령들을 죽이는다.

 

아으, 하늘의 태양이 스스로 빛을 거두고, 밤을 비추던 달이 어이없이 빛을 잃었으며, 고운 빛깔로 몸을 채색하던 가을 나무들이 황망히 붓을 집어던지는 도다. 흑암이 도저하므로 촛불마저 숨을 죽이고 스스로 소화消火하였은즉, 무엇으로 세상을 밝히며, 무엇으로 인하여 길을 찾을 것인가. 이런 경황에 도무지 무언가를 사유하고 그것을 언설로 표현할 길이 없는지라. 사유는 파편이 되어 뇌신경 사이를 강물 위를 부유하는 거품이 되어 떠돌 뿐이며, 언어는 난분분 허공중에 흩어지는구나. 자판을 두드리는 손꾸락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커서는 인내하지 못하고 허망한 깜빡거림으로 하릴없을지니, 오호통재라! 오호 애재라!

 

2022년 10월 29일 신神의 시계가 멈추고, 일상은 무너졌으며, 깊은 자흔이 우리의 머릿속 전두엽에 굵은 덧살을 만들어 놓았도다. 슬픔은 한계용량을 초과하여 오히려 차분함을 가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고,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통곡이 천지를 흔드는 도다. 하물며 ‘참사’라는 말조차 지워버리고, ‘사고’라는 대체된 말로 사유를 제한하는 전제專制의 땅이 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2014년 4월 16일의 참사가 남긴 트라우마가 아직도 또렷하거늘, 강도를 당하듯 맞닥뜨린 ‘이태원 참사’는 기도하는 이의 합장을 무색하게 하였고, 시와 지혜의 언어를 수렁에 빠뜨렸으며,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를 빼앗아 참담한 침묵에 이르게 하였고, 춤추는 이의 두 다리를 한낮 의미 없는 헛발질에 이르게 하였도다.

 

아으, 신이시여! 이런 사정을 당하매 어찌 저주의 말을 아낄 것이며, 정의의 오른팔을 들어 원수를 치지 않으시렵니까. 일백 육십 여 억울한 영혼에게 희디 흰 두루마기가 입혀져 들려졌으니, 그들의 세세원정細細冤情을 살펴 들으시고 독룡毒龍의 정액精液을 남김없이 훑어 짜내고 정소精巢를 폐지하여 화禍의 근원을 발본하소서.

 

아, 정녕 작금의 현실을 직조해내었을 그 실을 토해놓은 버러지들의 꿈틀거리는 의기양양이 역겹도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그 추악한 몸뚱아리를 일으키어 파토를 일삼는 독룡毒龍의 자식들이, 한 손엔 태극 깃발을 들고 다른 손엔 백성적조의 깃발을 휘두르며 광화의 땅을 짓밟고 용산龍山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았으니, 오호라 그 상서로운 땅이 어찌 이리도 더럽혀질 수 있으리오.

 

본시 적룡의 알이 배태되고 부화한 자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발설지옥에 떨어져 혓바닥이 뽑히고 펜을 잡았던 손꾸락이 짓이겨질 형벌을 예정한 언필칭 언론이라 하는 것들과, 촛불정신의 지고한 과업을 가벼이 여기고 기껏 국회의원질이나 해먹을 요량만 궁구하고 개혁을 똥 누다 끊고 화장실을 기어나오 듯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들과, 눈멀고 귀먹었으며 노망으로 뇌세포가 석회화된 채 좀비가 된 줄도 모르고 사람대접 못 받아 환장한 사람도 아닌 늙은이들과,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니라 더러운 돈지랄의 궁극으로 여기며 아파트시세에 목을 맨 천박한 중생들과, 젊음과 미래를 오직 돈벼락 맞기에 투신하여 보이지 않는 돈에 실물인 중앙은행권을 얹어 뻥튀기하듯 튀겨지기를 소망하는 것들과, …것들과, …것들과, …것들과, 것들이 지어낸 부화장에서 그 더럽고 기괴한 몸뚱아리를, 천지를 부르르 떨게 하는 악취와 함께 드러내었으니, 그 부화장을 짓는데 숨을 보태고, 물질을 보태고, 몸을 보탠 마구니들은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레라. 아울러 마구니들에게 편승하면서 독룡毒龍의 아가리에 저 자신의 탐욕을 얹어 미망迷妄을 먹이로 던져준 자칭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화 있을진저!

 

우리의 거룩하고 신실하신 신神께오서는 눈 없으시되 천안天眼으로 세상을 보시고, 귀 없으시되 온 우주의 모든 소리를 모아 들으시는 바, 특히는 억울한 이들의 원성에 민감하시며, 촉觸하지 않으시되 모든 떨림을 감지하시느니, 그리하여 없이 존재하시는 유일자唯一者라 칭함을 받으시니라. 항차 이러하신 분께서 억울하게 그 명命이 박탈된 이들의 원을 풀어주시지 않으랴. 무릇 죄 없이 희생된 이들의 피는 순정하여, 박해자의 죄악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룩한 제물이니, 오늘 이 땅에 만연한 독룡毒龍의 자식들이 저지른 만행을 하늘에 제소하는 것이라. 그리하여 심판은 세상이 예측할 수 있는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창졸간에 이뤄질 것이니, 오호라 이를 이름하여 정의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이 희생자들이 흘린 피의 값으로 그들의 원한을 천만 배로 갚아 줄지라도, 그 땅에 아울러 숨 쉬며 살아온 백성들이 독룡毒龍의 마기魔氣를 간파하고, 그것을 파기하기 위한 구체적인 의기義氣를 보여야 할 것이라.

 

아으, 궁벽한 산골의 누거에 의지하여 겨우 몸이나 보전하며 살아가는 서생이 어지러운 누항의 일에 분기憤氣를 드러내는 도다. 이는 전 우주가 하나의 조화造化에 근원하고 있으며, 천지만물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동기同氣로부터 비롯하여 개성을 표출하느니, 나는 나로써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남의 존재로부터 연유함에 따름이라. 이태원의 참혹한 일이 비록 인간의 변괴이나 모든 백성의 육혈肉血을 저미고 말리는 아픔인 것은 이로 인함일러니, 오호통재라, 정신이 흐트러지고, 사유의 맥은 끊기고, 말은 자꾸 미끄러져 엉뚱한 발화를 일삼는도다. 아, 자꾸만 미끄러지는 말과 심령을 다잡기 위해, 저 바빌론의 디아스포라로 주저앉은 동포들에게 웅혼한 음성으로 새 하늘 새 땅의 전망을 보여준 이사야의 참칭자이며 완성자였던 한 은자의 두루마리를 목청 높여 읽어 보아야겠도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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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낙영(글쓴이,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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