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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終] 고상균의 男다른 성교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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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

posted May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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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68

가해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주변인을 세우는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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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시 교내방송강의도 가능한가요?

 

봄이 시작되던 어느 날, 디지털성폭력 가해자 상담을 계기로 알게 된 모 고둥학교 보건 선생님이 전근 간 학교의 성평등 교육을 의뢰했다. 그런데 교내방송강의라니!

 

그럼 저는 카메라를 보고 강의하는 것인가요?

 

아뇨. 한 반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강의를 전교생이 각 반에서 영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이게 참 그렇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성교육은 현행교육과정에서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현장에 따라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화나 토론, 모둠별 활동이 많은 강의특성상 성평등 교육을 방송으로 진행하는 것은 효과에 있어 제한이 크다. 게다가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속성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니 어려움은 더욱 상당하다. 하지만 어쩌랴?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것이고, 또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 보려는 현장의 요청이 있으니 최선을 다할밖에.......

 

그런데요, 저처럼 머리 큰 사람이 영상에 나와도 괜찮을까요?

 

쓸데없는 질문으로 긴장감을 털어보려 했다만, 고민이 많아졌더랬다.

 

 

2

 

 

경기 남부에 위치한 여남공학 중학교였다. 요즘엔 학급인원이 스물다섯 넘는 학교를 보기 어려운데 서른 명이 훌쩍 넘는 학급이 대부분이라는 말에 신기함마저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와! 나 때는 예순 명이었는데, 우리 반은 쉰 명이 넘었는데 막 이러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평등한 관계 만들기를 주제로 한 시간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평등한 관계 맺기를 위해서 ‘동의’를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이때 두려움이나 부담 없이 거절을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형성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상호간의 평등이 전제되어야 함을 안내했다. 이 가운데 참여인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 동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하려는 스킨십은 상대방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요?

 

한 남자청소년 참여인이 목소리 높여 말했다.

 

성적수치심이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는 이후 질문만 나오면 성적수치심!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하! 이건 단순한 장난일수도 있지만, 남성다움이라는 이름 속에서 행해지는 일방성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설명에 대한 백래시, 즉 저항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성적수치심은 ○○님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요?

 

시간 내내 웃으며 성적수치심을 외치던 그는 일순간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애인 손잡는 것도 폭력이면 남자는 다 잠재적 가해자인 건가요?

 

서른세 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3

 

 

성/평등교육 현장에서 강도와 경우는 제각각이지만 이 같은 저항은 심심치 않게 경험하게 된다. 잠재적 가해자.......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랑스레 통용되던 행위들이 적어도 더 이상 공공연히 언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강고한 남성연대는 이를 희화하거나 피해자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곤 한다. 이와 함께 대응논리 역시 등장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단어가 그 참여인이 외쳤던 ‘잠재적 가해자’다. 이는 피해자를 위축시킴과 동시에 가해자 및 이를 바라보는 남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효과를 가진다. 저 피해자에 동조하면 너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어! 같은 거다.

 

노동자가 자본의 편에 서는 언론을 선호하고, 노동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지 않는가? 이는 노동이 소외된 사회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상황, 당면한 사회구조를 자기의 계급과 입장이 아니라 동경하고 우상화하는 권력과 자본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데에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하겠다. 같은 구도를 성평등 이슈에서도 보게 된다. 성폭력의 권력적 측면을 생각해 볼 때, 압도적인 다수는 폭력을 행사하는 쪽보다는 그 위험에 노출되거나 위계적 폭력을 휘두를 권력이 없을 가능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권위적 남성성을 동경하는 남성연대 구성원들은 소수의 가해자들을 영웅시 혹은 내심 부러워하는 가운데 피해자를 조롱하고 기꺼이 잠재적 가해자의 방패 뒤에 서려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성/평등교육은 주변인들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와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시에 젠더 피라미드에서 상층부를 지향하는 남성성에서 벗어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감수성을 가져보자 제안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그 참여인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참여인을 가해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주변인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어지고 있는 과정입니다. 가해의 편에 아니라 피해자의 따뜻한 친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작고도 다양하니까요.

 

45분의 시간 동안 그 엄청난 주제들을 참여인 모두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킬 능력이 아쉽게도 내겐 없다. 다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두세 명이라도 그 시간의 주제들을 떠올리며, 자신과 삶의 자리를 반추할 수 있길 두 손 모아 소망할 뿐이다. 교내 방송강의가 끝난 후 담당 선생님과 인사하고 나선 복도에서 한 여학생이 다가와

 

선생님이 좀 전에 방송으로 강의하신 분인가요? 강의....... 제겐 정말 좋았습니다!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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