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노 作, <화실의 두 여인> 320 x 230, Oil and pencil on canvas, 1978
아버지의 그림, 아들의 이야기
1. 미완성의 완성
“왜 그리다가 말았어요?”
아무리 봐도 드문드문 비워둔 그리다가 만 그림이다.
거기에 떡하니 서명까지 반듯이 해 놓은 것을 보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거기서 손을 더 대면 그림을 망칠 것 같아서……”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그 후 아들은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그 짧은 대답 속에 들어있는 뜻을 곱씹어보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상황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덧칠하고, 뜯어고치고, 완전히 다시 그려봐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고 느껴지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이거다’ 싶어서 붓을 놓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단연코 이 그림은 후자일 것이다.
이 시기에 아버지는 바탕에 스케치한 연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유화, 그러니까 마치 수채화처럼 엷게 칠해진 유화를 그리곤 했다. 어느 여름날 나른한 날씨에 고요한 침묵이 흐를 것 같은 화실에서 열심히 그림에 몰두한 두 여인은 아버지의 빠른 연필과 붓놀림 때문에 살짝 생기를 품는다.
아버지는 그림을 배우러 온 여인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잠시 짬을 내서 그 모습을 재빨리 화폭에 옮겼다. 왜 그랬을까? 무엇을 담고자 했던 것일까? 무엇이 ‘여기까지’라는 느낌을 주었을까?
전업 화가였던 아버지의 생활은 늘 고단했다. 그렇기에 조그맣게 마련한 화실에서 학생이나 취미로 미술을 배우는 사람을 가르쳐야 했다. 아버지는 이것을 반기지 않았다. 때론 싫증을 내고 짜증스러워했다. 자기 자신만의 작품 활동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지 못하는 형편을 대변하는 것이 화실의 취미생들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버지는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의 모습을 여러 작품으로 남겼다.
여인들은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가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들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흰 캔버스만 보인다.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두 여인이 자신에게 배운 바에 따라서 한여름에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 자체가 아버지에게 저 모습을 담고 싶다는 충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동이 표현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림은 완성되었다. 더 개입하지 않았고, 더 파고들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뒤편에 어렴풋이 묘사된 사람이다. 성별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작품의 제목을 그 사람은 무시하고 <화실의 두 여인>이라고 붙였다. 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버지 자신이라고밖에는 추론할 방법이 없다. 아버지는 여인들과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떠나서 함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자기 자신을 거기에 그림자처럼 투영한 것일 터이다.
화가도 아니고 미술전문가도 아닌 아들의 눈에 이 그림이 미완성으로 느껴졌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니 저 때 화필을 재빨리 움직이게 한 아버지의 느낌과 충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미완성처럼 느껴질 것이다. 묘사될 것이 분명한 형체를 드러내고 화폭이 색감으로 꽉 들어차야만 완성으로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일 것이다. 그러나 작고하신 아버지의 그림을 정리하면서 아들은 이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야! 이게 완성이다.”라고 말하려는 듯 반듯하게 서명해둔 것을 보면서 아들은 어느덧 아버지의 마음에 동승한다. 그리고 저렇게 연필로 쓱쓱, 붓으로 툭툭거린 것에서 완성된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