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3. 알프스 산골짜기 집 한 채의 ‘공간’, 그리고 니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창의성은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공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요즘 사무용가구 Fursis의 TV 광고가 참 잘 만들었다고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자기 자신이 ‘공간’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체감하거나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2014년 수작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보고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절정의 감수성 연기에 매료되거나, 스위스 ‘실스마리아(독일어 발음인 질스마리아가 정확한 표기)’의 자연 풍광과 ‘말로야 스네이크’라고 불리는 구름의 신비로운 이동에 압도되거나, 현실 속의 영화, 영화 속의 연극이라는 3중 구조로 펼쳐지는 짜릿한 스토리에 두뇌 세척을 받았다면 아마도 충분히 이 영화 속 영양분을 쏙 흡수한 것이 될 것이다. 단 한 가지를 빼고 말이다.
그 나머지 한 가지는 ‘공간’이다. 구체적으로 스위스 산골짜기 깊숙이 단아한 자태로 자리 잡은 극작가의 집. 스크린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사진과 멀리서 보이는 시체로만 등장) 실제로는 영화의 모든 내용을 창출해낸 극작가 빌렘 멜키오르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작품 활동에 몰입했던 집. 영화의 반 이상이 이 집의 내부, 바깥, 그리고 집에서 뻗어나간 트래킹 길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그게 뭐? 그런 영화는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렇다. 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영화는 많이 있다. 하지만 영화감독이 그 공간을 특별히 애지중지하는 느낌을 주고, 그 공간을 카메라에 완벽하게 잡아내고, 혹시나 관객이 그런 감독의 의도를 놓일까봐서 실내에 그 집을 그린 그림과 설계도를 벽면에 장식해 놓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선 영화에서는 이 집을 세 가지 각도에서 완벽하게 잡아준다. 필자는 건축에 관한 한 ‘멋지다’와 ‘멋대가리 없다’로 겨우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문외한이기는 하지만 이 집이 세 가지 각도에서 온전하게 카메라에 담겨질 때는 무엇인가 특별한 감성이 솟구친다. 이 집은 단지 집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뱀처럼 구불구불 하염없이 이어진 길을 자동차가 가야한다는 사실, 그리고 트래킹을 나가면 압도적인 경외감을 자아내는 알프스의 실스마리아 풍광이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집은 거기에 존재한다.
어쩌면 이 집은 스위스의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어떤 유명한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집인지도 모른다. 건축가에게 하나의 살림집은 거대한 기념관 하나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과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는 어떤 위대함이나 영원함이라는 가치보다 일상적 삶과 실용성과 안락함, 그리고 주변 자연 환경과의 조화로움이 모두 고려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아사야스 감독은 네 번에 걸쳐 위와 같은 앵글의 화면을 통해 ‘여기 이곳에서 극작가는 아내와 함께 세상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라고 말해준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집안을 살피는 카메라도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곳이 작가가 일하는 곳이라고 우리에게 또렷이 말해준다. 대충 놓여 있는 그러나 널브러져 있지는 않은 물건들, 완벽한 하모니는 아니면서 눈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은 아닌 가구들, 소박하고 단순함 속에 포인트를 주는 벽난로와 창문 위의 문양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 집은 남몰래 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극작가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감독의 정교하고 세련된 연출의 결과이다. 그냥 어떤 집 하나를 덜컥 빌려서 촬영한 것이 아니다. 외관은 몰라도 인테리어는 세밀하게 손을 보았고, 액자 하나, 소품 하나까지 신경을 썼다는 것은 이 작품을 위해 영화 인테리어 전문가가 스케치한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는 ‘건축 속의 건축’이 있다. 벽에 걸린 그림 중에는 세 점이 이 건물 자체(또는 유사한 건물)를 그린 것이며, 또 다른 하나의 액자에는 이 집의 설계 스케치가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속 연극’, ‘연극 속 영화’의 복합구조를 드러내는 줄리엣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늘어졌다 조여졌다 하는 팽팽한 연극 대사 연습 장면들 배경에는 이 그림들이 계속 노출된다. 집이라는 공간 내부는 다시 알프스 산허리에 자리 잡은 집의 바깥을 상기시킨다. 마치 영화가 연극을 상기시키고, 다시 연극이 영화를 끌어가는 구조와 유사하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다. 아마도 죽은 극작가 멜키오르가 사색과 작품 구상을 하며 거닐었을 그래서 마지막 죽음을 선택한 장소이기도 한 트래킹 코스에 펼쳐지는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는 이 영화를 꼭 봐야 하는 눈부신 장관을 연출해준다. 집이라는 닫힌 공간도 이 한없이 열린 공간, 갑자기 세상 속의 나를 불현 듯 상기시키는 말로야 고개(이 영화의 개봉 후에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와 융합되어 본래의 의미를 찾는다. 영화 속 연극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줄리엣 비노쉬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연극의 배역을 맡게 되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도전, 자기 부정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에 대한 강한 긍정을 통해 가능했다. ‘건축 속의 건축’ ‘집 속의 집’을 통해 반추해내는 자기 자신의 현재적 실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창출해내는 ‘공간’의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니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실스마리아는 니체의 전기나 글에서 독일어 ‘질스마리아’로 등장한다. 니체는 건강 때문에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가장 활발히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을 때인 1882년 이후 주로 여름이면 이곳 질스마리아를 찾아 조그만 단칸 방 하나를 빌려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한 곳이 이곳이며 그 핵심의 하나인 ‘영원회귀’ 사상을 갑자기 깨달은 곳도 이곳이다. 감독이면서 극본까지 쓴 아사야스가 이 영화에 니체의 사상을 담고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분방하면서도 책임감 있고 강렬한 자존감으로 뭉쳐진 두 여성 캐릭터가 자기 자신의 극복과 내적 상승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니체의 ‘위버멘쉬(흔히 초인)’ 사상이나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담은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본래 이 영화의 제목은 <실스마리아>였고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개봉되었다. ‘클라우즈 오브’가 앞에 붙은 것은 미국의 배급사의 요청 때문이었다. 제목이 ‘구름’에 초점이 맞추어지는지 아니면 ‘실스마리아’라는 지명에 맞추어지는 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실스마리아’라는 지명 자체는 웬만한 유럽의 지식인이면 금방 니체를 떠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현재 니체가 매년 머물렀던 집을 개조해서 소박한 박물관인 ‘니체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니체하우스
여기에 하나의 덤이 있는데 그것은 실스마리아에 있는 호텔 발트하우스이다. 니체는 가난했기에 이 비싼 호텔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영화 속에서 헨델의 실내악이 연주되는 곳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아인슈타인, 아도르노가 머물렀던 호텔이며 안네 프랑크가 여름방학을 보낸 곳이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아사야스 감독이 우리에게 베푸는 친절한 관광가이드쯤으로 생각해 두자.
호텔 발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