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7. <더 스퀘어>, 누가 크리스티안에게 돌을 던지나?
“Help! 도와줘요!”
멀리서 이런 낯선 외침이 들려올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무엇인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삶에 침입해 방해할 것만 같은 이런 외침은 가능한 빨리 외면하고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정치적 올바름’에 익숙해져 있는 스웨덴의 중산층 시민들도 마찬가지인 듯 잰 발걸음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더 스퀘어>의 감독 루스 외스틀룬드는 하나의 약속된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마치 도로에 건널목 표시가 있으면 모든 자동차가 보행자를 살펴야 하듯이, 서로 간의 ‘돌봄’이 당연하고 당위적인 되는 특정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3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더 스퀘어’이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스퀘어는 신뢰와 돌봄의 성역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이 대사는 영화 속에서 다섯 번은 족히 또렷하게 반복된다.)
2017년 제7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스웨덴 영화감독 루스 외스틀룬드의 <더 스퀘어>. 처음 3~40분은 좀 힘들다. 멀고도 낯선 스웨덴 영화에 코드를 맞추려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몰입하고 나면 2시간 30분을 붙잡히고도 한 동안 얼얼해야 한다. (물론 쉽고 간단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깊고,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과 메시지를 풀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몇 가지 인상만 남겨본다.
- 스웨덴에도 노숙자들이 참 많구나. 그중 대부분이 난민이다. (스웨덴은 2015년 약 16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여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인구대비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한 국가에 올랐으며 2017년에는 모두 3만 여 명의 난민을 받아들여 인구 100만 명 당 난민 수도 3천125명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에 이어 3번째로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 스퀘어 사방에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오는 “Help me! Help me.”는 나(관객)을 향한 도전이다.
- 사무실에서 아기가 울고, 개가 사무실을 돌아다니고, 토크쇼 중간에 틱장애자(투어렛 증후군)가 끊임없이 욕을 해대는 중에도 저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는구나.
- 스퀘어에는 공권력이 없다. (영화에서는 경찰이나 관리자가 등장해야 될 만한 많은 상황에서 어떠한 경찰이나 중재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 ‘인간 고릴라’는 퍼포먼스 예술의 최고의 경지이다. 섬뜩하다.
- (한 가지 추가) 다른 영화에서 본 그 어떤 섹스보다도 기묘한 섹스.
풍부하고 난해한, 유머러스하면서 불편한, 댄디하면서 뒤틀린 <더스퀘어>를 소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와 관객 사이의 영화 속 공간 ‘더 스퀘어’에 대한 묵시적인 약속인데, 그 약속은 영화 속 공간에는 어떤 형태의 공적인 또는 관리적인 또는 중재자적인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경찰도, 보안요원도, 건물관리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당사자들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 소매치기 당한 스마트폰을 찾기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서야 하고, 고급 아파트에 이민자 소년이 들어와서 소리를 고래고래 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갈라 디너쇼의 침팬지 퍼포먼스의 끝이 ‘본래’ 집단 구타에 의한 해결이듯이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만만치 않은 현대미술 세 작품과 만나게 된다. 물론 영화의 곳곳에서 스쳐 지나가는 벽에 걸린 회화 작품(주인공의 집에 걸린 인상적인 현대 회화까지 포함해서)은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이 영화가 현대미술의 이중성에 대한 조롱과 풍자라는 일반적인 평가는 <더 스퀘어>의 수월한 한쪽 면만 본 것이다. 외스틀룬드 감독이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다. 영화가 그 이중성을 풍자한 것이라고만 말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외스틀룬드가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지만 한국 개봉 관객 1만 명 정도뿐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현대 예술의 주체’이지 누굴 한가롭게 조롱할 입장이 아니다. 현대미술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위한 ‘뼈아픈 성찰과 고통스런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 속에 미술관 앞에 설치된 ‘더 스퀘어’는 세 번째로 만든 것이다. 작품 설명판에 no.3이라는 숫자가 있다. 첫 번째 ‘더 스퀘어’는 외스틀룬드가 영화 만들기 2년 전 실제 스웨덴 번화가에 설치미술로 직접 만들었다. 아마도 별 관심을 못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두 번째 작품도 설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작품은 세 번째다. 영화 속에서는 아르헨티나 작가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실제 ‘더 스퀘어’라는 설치미술의 작가는 외스틀룬드 감독 자신이다. 그는 이 작품에 깊은 뜻을 담으려 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영향을 주기를 원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현대미술 작품에 대해 영화의 등장인물이 실제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한 장면은, 주인공 크리스티앙이 아직 개봉하지 않은 전시장에 두 딸을 데리고 가서 진지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따듯한 장면이다. 영화의 요소를 제거하고 순수하게 설치미술 ‘더 스퀘어’를 본다면 꽤나 인상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영화가 보여주듯이 스웨덴의 거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의 현장성과 결합한다면.
이 영화에는 '더 스퀘어'가 전시되기 전에 이미 뮤지엄에 전시되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이 나온다. 하나는 흰색의 넓은 방에 군데군데 일정한 간격으로 자갈더미를 쌓아놓고 벽에 네온으로 You Have Nothing이라고 써놓은 것이고, (아마도)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은 의자가 아무렇게나 엉겨 붙어 불안정하게 쌓아올려진 채로 흔들거리고 그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삐꺽거리는 소음이 신경을 몹시 거슬리게 하는 작품이다. 모르긴 몰라도 감독은 이 작품들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였으리라고 본다. 전달되는 느낌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 작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주인공들의 철저한 무관심 대상이 된다.
또 하나의 작품은 행위예술을 비디오아트와 결합한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유인원은 이런 연기의 최고 프로페셔널로 헐리웃에서 <혹성탈출> 등의 동작 연기를 한 테리 노터리를 불러왔다. 미술관에는 비디오로 촬영된 그의 얼굴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 간혹 그르렁 거리기도 한다. 물론 이 작품에도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이 행위 비디오아트를 실제 행위예술로 펼치는 갈라쇼 장면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역할을 한다. 그곳에 모인 숙녀 신사들, 미술관 관계자들조차 그의 행위예술이 원숭이 흉내 잘 내는 사람의 짓궂은 개그에 멈추기를 바랐지만 그 행위예술가는 공포의 극단으로 끌고 가서 집단적인 구타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지는 것까지로 행위예술을 확장했다. 원숭이 흉내 잘 낸다고 웃음과 박수를 받는 현대 행위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 작품 자체가 매우 범상치가 않고 이를 위해 외스틀룬드 감독이 무척이나 공력을 들였는데 이를 현대미술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현대예술(감독 자신의 영화를 포함하여)이 놓여 있는 자리를 냉정하고 아프게 바라보면서 단절된 소통, 그로인한 격렬한 불협화음을 그대로 노출시켜 현대예술의 자리를 재정의 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된다.
잘 정돈된 사회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편한 소음이 터져 나온다. 그것이 일상생활이나 일을 방해하는 소음이라면 상호간의 이해와 융통성으로 대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의 반응,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Help!’의 외침은 참여와 개입을 요구하게 만든다. 멀쑥한 스웨덴의 중산층 사회에 이런 외침이 비수처럼 침투해 들어온다. 종종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평론에는 주인공 크리스티앙을 이중인격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런 요소가 영화의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Help!’에 반응하는 사람은 크리스티앙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크리스티앙에게 그 외침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외침이 아니라 주체가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제 두 딸을 동반하고 그 외침을 찾아 나선다. 마치 그 외침이 당연히 도와주기로 약속한 ‘더 스퀘어’에서 들리는 것처럼.
(‘온몸 악기’의 재즈 재주꾼 바비 맥퍼린과 첼리스트 요요마가 만들어내는 ‘아베 마리아’가 영화 전편에 걸쳐 절묘하게 흘러나온다. 영화의 내용은 잊혀도 이 음악만은 기억 속에 똬리를 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