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목사 시즌2
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7
일곱: 편의점에서 만나는 ‘뜻밖의 청량감’
(스페인, 에스트레야 담 이야기)
1
갑자기 공돈 일억이 생긴다면?
이런 생각, 한 번 쯤 해 보신 분 손 번쩍! 제발 여기에 ‘아니, 돈이 있으면 뭐 하냐 시간이 없는데’라거나, ‘현실 가능한 소릴 좀 해라. 이딴 식이니까 너는 맨날... ’과 같이 대거리 붙진 말아주시길, 돈 드는 것도 아닌데다가 공상은 그저 공상일 뿐이니.......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맨날 합리적이고 빈틈없이 살 수 있겠는가? 가끔은 빈 시간, 멍한 상태도 재충전과 리셋에 도움이 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뭐 기계도 ‘업데이트 시간’엔 노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쉼이야!
아무튼 그렇다는거고! 좋은 생각이 날 때 까지 예금해 놓겠다는 방코(banco)스타일부터 모두 부모님을 드리겠다는 효녀심청타입까지....... 어디 가서 물어보면 생각보다 엄청 다양한 대답이 쏟아지는데 놀라게 된다.
그럼 나는? 음....... 이딴 공상과학적 잡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내가 어디 가서 사람구실이나 할까싶은 마음에 늘 걱정하느라 고생 많으신 어머니와 형, 그리고 장모님께 각각 천만 원씩 드린 후,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겠다. 어디 가서 뭘 할 거냐면? 쿠바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 그림 아래서 맥주마시며 기타치기, 피오르드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노르웨이 침엽수림에서 오로라 보며 맥주마시기, 쭉 이어서 더블린 기네스축제・뮌헨 옥토버페스트, 플젠 필스너축제에 이르는 유럽 맥주 축제 돌아다니기 같은 걸 진심으로 가서 해보고 싶다.
이걸 다 해보려면 칠천만원으로는 부족하려나? 아 맞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상이었지! 그러니 현실가능성 여부 따위가 끼어들 틈을 주지 말고! 이같이 불가능 할 것 같았던 로망 중 하나가 ‘노을이 드리우는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며 병맥주 한 모금하기’였다. 그런데 지난해 초여름, 공상에만 그칠 것 같았던 그 꿈이 내게 현실이 되었더랬다. 2019년 6월,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스페인에 다녀왔다.(없는 돈을 어떻게 모으지? 아이참내! 또 현실가능성이 고개를 들었군. 자 침착해, 침착해!)
2
6월의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였다.
일단 밤 열시는 되어야 땅거미가 드리울 정도라면 믿으시겠는지? 정말 그랬다. 태양은 하늘의 주인인양 도무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뜨기는 또 얼마나 빨리 뜨던지. 몬순기후지역처럼 후텁지근하진 않더라도 온종일 내리쬐니 한 낮엔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는 그 나라의 낮잠문화 ‘시에스타(Siesta)’가 왜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 그냥 이해가 되었달까?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오후 서너시까지는 관광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으니까.......
하지만 그 땅에서 만났던 뜨거움 중 ‘찐’은 단연 그 땅의 사람들이었다. 늦게 지는 해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페인 사람들은 참 늦게까지 북적거렸다. 그 중 상당수는 관광객이겠다는 가정을 하고서라도 늦은 새벽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현지 주민의 확인할 수 없는 전언에 따르면 직장마다 오전에 직원 없는 빈자리를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단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여파로 지각하거나 아예 결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다. 태양을 닮은 그 이들의 어마어마한 열기를 세비야에서, 격정적 가락과 춤사위로 관중을 매료시키던 플라멩고와 도시 전체를 춤판으로 만들어버렸던 퀴어프라이드퍼레이드를 통해 생생하게 느꼈더랬다.
한 낮의 더위와 밤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아니 몸 마름을 달랜 후 그 열기에 더욱 더 깊이 빠져들기 위해서라도 한줄기 시원함과 약간의 알콜은 필수! 이에 최적화된 음료는 틴토 데 베라노(Tinto de Verano)와 라거맥주였다. ‘여름와인’이라는 뜻의 틴토 데 베라노는 와인과 탄산음료, 약간의 레모네이드와 럼이 얼음과 함께 들어간 저알콜 음료다. 가격도 싸지만 시원함과 청량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기에 시에스타 시간 카페 여기저기에서 틴토 데 베라노를 들이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에 나도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저알콜, 청량감하면 맥주가 아닐까? 자연스레 ‘세르베사(맥주, Cerveza)’가 적혀있는 집을 수 일 굶은 늑대마냥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위가 강한 지역은 대개 라거가 강세를 이룬다. 그건 더위를 날려버릴 시원함과 청량감을 맥주에게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페인의 대중적 맥줏집 역시 라거가 주종을 이룬다. 특이한 것은 거대한 스페인 맥주시장의 과반 이상을 산미겔, 하이네켄 등의 외국맥주가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산미겔은 스페인이 무단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필리핀의 맥주다. 굳이 예를 들자면 테라가 일본 맥주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에 대해 스페인 경제신문에서는 ‘산미겔이 스페인을 역으로 식민지화했다’라고 평하기도 했단다.
3
외국계의 홍수 속에서도 상당한 판매실적을 올리며 선전하고 있는 스페인 맥주회사 중 단연 탑은 ‘담(Damm)’이다.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이 회사는 1876년 첫 번째 맥주를 출시했는데 이는 대중화된 스페인 양조장 중 가장 먼저였다. 양조장 명칭은 창업자 오귀스트 쿠엔츠만 담(August Kuentzmann Damm)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스페인의 첫 번째 대중양조장이자 현재 스페인 자국 맥주 중 판매1위, 붙어있는 수식어로만 보면 스페인 토박이일 것 같지만 사실 아우구스트 담은 프랑스의 알자스사람이었다. 알자스? 그래 그거 맞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거,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인 그곳 말이다. 그곳에서 펍을 운영하던 담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영토분쟁과 전쟁으로 시끄러웠던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1871년 프로이센이 알자스를 점령하자 마침내 식솔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나라 바르셀로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양조장을 준비하던 담은 더운 스페인에서 프랑스-독일식의 맥주는 사업성이 없겠다 판단했다. 뜨거운 태양아래에 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청량감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거 맥주’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담의 첫 번째 맥주는 고향에서 빚었던 맥주에 비해 알콜도수를 낮춰 양조되었다. 비록 전란을 피해 등지긴 했으나, 고향을 잊지 못했던 담은 알자스의 중심도시 스트라스부르크로 첫 맥주의 이름을 삼았다. 맥주에 있어서 상대적 주변국이었던 스페인에서 담의 맥주는 승승장구했고, 곧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맥주로 자리잡았다. 달라진 위상에 걸맞도록 상표명도 스트라스부르거에서 ‘에스트레야 담’으로 변경했다.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삼고 있는 카탈루냐지방의 깃발에는 별이 그려져 있는데, ‘에스트레야(Estrella)’는 이 지역 언어로 별을 뜻한다.
에스트레야 담의 첫 맛은 시원함이다. 조금 약간 바디감은 더욱 시원한 목넘김의 느낌이 상쇄하고도 남는다. 땀을 뻘뻘 흘린 후, 혹은 답답한 고민이 마음 한 가득 있을 때 마시면 이내 그 후텁지근한 느낌을 절반쯤은 날려줄 것이다. 에스트레야 담, 그 특유의 청량감은 원재료에 더해진 ‘아로스’, 즉 쌀에 있다. 이때 쌀맥주하면 칭따오!하면 그대는 맥알못을 벗어났다하겠다. 산미겔까지 생각난다면 중급과정 통과. 인도의 킹피셔나 터키산 에페스까지 언급할 수 있다면 상당한 수준임에 분명할 것이다. 에스트레야 담은 이 계보에 있는 유럽의 쌀 맥주다.
4
신기하고도 고맙게도 스페인에서 몸과 마음의 열기를 식혀주던 그 맥주를 집 옆 편의점에서도 만날 수 있다.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에스트레야 담은 빨간색과 검은색이 있는데 주로는 빨간색 캔일 것이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에스트레야 담은 4.6도인데, 현지에서 마셨던 것은 이보다 높은 5.4였다. 아마도 카스 등에 길들여진 입맛을 겨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양을 닮은 나라 스페인에서 연일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가파르게 올라가더니만 급기야 요양원의 환자들을 버려둔 채 관계자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많은 어르신들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정말 안타깝고 끔찍한 뉴스가 전해지기도 했다. 급기야 치안유지를 위해 군이 동원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벽까지 자유와 열정을 만끽하는 그 이들에게 더는 슬픈 일이 없기를, 스페인을 포함한 세계 여기저기에서 흉흉한 기운이 하루빨리 물러나길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 격리 등으로 활동반영이 크게 위축되는 지금, 동네 편의점에 들러 빨간색 에스트레야 담을 꺼내 마셔보시길. 갑갑하고 흉흉한 요즘, 그로인해 불편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해 줄 것이다.
추신: 에스트레야 담은 캔과 생맥주 맛에 큰 차이가 있다. 이는 앞서 설명했듯 도수에 직접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담을 생맥주로 맛볼 수 있는 곳으로는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위치한 ‘엘 꾸비또’라는 식당이 있다. 이 곳에서는 에스트레야 담과 함께 담 이네딧도 맛볼 수 있다. 캔과는 다른, 파워풀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