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목사의 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하나, 맥주 없이 개혁도 없다!(No Beer! No Reformation!):
카타리나 폰 보라의 맥주, 그리고 루터의 기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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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적어놓고 보니 꽤나 열광했던 것처럼 보인다만....... 기실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해도 해도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게다가 혜성 마냥 4년 주기로 찾아오는 ‘애국과 민족 코스프레’가 영 마땅찮다. 하여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 같은 건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다. 이런 내게도 컬링 여성대표팀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비단 낯익은 이름 ‘영미’의 국민 유행어 등극이나 ‘안경선배’ 때문만은 아니다. ‘의성 마늘소녀’라는 별칭이 무색할 만큼 외면해왔던 지자체, 내부다툼으로 사실상 와해된 컬링연맹, 부실공사 보완 때문에 적응훈련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경기장 등 가히 재앙 수준의 상황을 딛고 보여주었던 미친 경기력과 당당함은 그야말로 리스펙! 리스펙! 수도원 맥주 이야기 속에서도 ‘팀킴’의 능력과 당당함에 버금갈 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카타리나 폰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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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와 신부의 결혼!'
1525년 유럽에서 ‘역사상 가장 불경한 결혼’으로 불렸던 스캔들의 주역, 카타리나와 마틴 루터.
카타리나는 수녀였다. 그것도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봉쇄수녀원 소속! 하지만 그 엄격한 통제생활도 그녀의 대담하고 진취적인 성향을 잠재우지 못했다. 우연히 보게 된 루터의 글 속, ‘하느님은 독신보다 결혼을 더 기뻐하신다’는 내용에 고무된 그녀는 마침내 수녀원담장 넘어 세상으로 나갈 것을 결심한다. 문제는 방법! 동기수녀의 아버지가 수녀원생필품을 납품하고 있음을 알게 된 카타리나는 자신이 규합한 십여 명의 친구들과 함께 반출되는 청어통에 숨어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함께 나온 친구들의 결혼을 도운 카타리나는 마침내 썸남 루터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95개조 반박문의 여파가 생각보다 커지는 것에 긴장했던 루터는 주저 또 주저....... 그러던 어느 야심한 밤, 장례용 드레스를 입고 찾아온 카타리나를 보고 눈동자가 컬링스톤만해진 루터.
‘아니 누가 죽기라도 했단 말이오?’
‘하느님이 죽었지요.’
‘.......?’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이토록 용기를 잃을 수 있겠소?’
카타리나의 기막힌 ‘Cheer up Baby!’로 단박에 우울증의 늪에서 탈출한 루터는 기독교개혁의 기치를 다시 한 번 높이 들었고,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루터가 42살, 카타리나가 26살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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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가 제공한 베텐베르크 수도원 건물, 대학교수월급과 설교 사례비....... 루터가 가족들의 생계를 아주 외면했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3여 3남의 아이들, 제자랍시고 찾아드는 식객들, 개혁에 동참했다가 위험해진 신변을 의탁하며 찾아든 사람들까지 근 수십 명을 감안해 볼 때, 루터는 ‘없는 게 더 나은 남편’이었다. 게다가 가계부를 적을 수 없을 만큼 ‘숫자바보’이기까지 한 루터를 잘 알았던 카타리나는 또 한 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수도원에서 배웠던 양조술을 이용, 지금은 루터하우스로 불리는 비텐베르크 옛 수도원 건물에 맥주양조장과 펍을 열었던 것이다. 그녀의 양조기술은 수백 개의 양조장이 성행했던 비텐베르크 안에서도 정평이 나기 시작했고, 사업은 번창했다. 맛있는 맥주를 즐기기 위해 몰려든 사람 대부분은 비텐베르크대학 소속의 교수와 학생들이거나 기독교개혁사상에 고취된 사상가들이었다. 이들과 어울려 열띤 토론을 주도하는 카타리나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풍경이었다. 덕분에 늘 시끌벅적했던 집 뜰을 보며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철딱서니 1도 없이 푸념하는 남편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향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당대의 핫한 여성 카타리나는 수많은 매력쟁이들의 구애를 시원하게 뿌리치고 16살 연상의 루터를 택했다. 그런 그녀를 애칭 ‘캐테’로 불렀던 루터는 그 사랑스런 약칭에 존경의 마음을 더해 ‘캐테 경’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또 기독교개혁 상황 중 순간순간 뒷걸음질 치려고 할 때 카타리나는 직접 빚은 맥주 한 잔을 루터 앞에 들이밀며 '퐈이링'을 외쳐주기도 했다. 이를 통해 힘을 얻었던 루터는 설교 중 ‘아내는 주군, 나는 신하’라는, 실로 당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노년에 이른 어느 날, 두 제후의 갈등을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떠난 급히 떠난 겨울 출장길에서 루터는 병약한 자신을 염려하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캐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경건한 남편을 소유했소. 당신은 나의 여왕, 그러니 집으로 향하는 길에 보게 되는 우리 집 지붕 꼭대기만 봐도 그저 좋은 당신의 남편에게 굴복하지 마시길!”
하지만 루터는 사랑하는 캐테를 다시 볼 수 없었다. 1546년 2월18일 과로로 쓰러진 루터는 운구마차에 실려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는 마지막 유언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내는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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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 이후 6년간 이어진 카타리나의 삶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모든 재산의 유일상속자로 아내를 지목한 루터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인근에서 발생한 슈말칼덴 종교전쟁으로 인해 농장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전란을 피해 오른 피난길마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임종도 살피지 못하고 남편을 잃은 슬픔과 평생 일궜던 가업의 상실, 거기에 겹친 부상은 그녀를 극도로 쇄약하게 했다. 결국 폐렴을 얻게 된 카타리나는 피난길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53세 되던 해였다.
작은 대학도시 비텐베르크 중앙광장에 못 미쳐 위치한 루터하우스 정원에는 성큼 한 발을 내딛고 있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이 서 있다. 생전의 그녀 역시 수녀원 담장을 넘어, 주저하는 남편의 손을 이끌고 세상으로 그리 당당하게 걸어 나갔으리라. 아쉽게도 카타리나가 운영하던 옛 수도원 건물의 양조장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 위치한 인(Inn)을 포함해 비텐베르크 전역에서 만날 수 있는 루터맥주와 비텐베르크 대학 옆 가르텐비어에서 맛 볼 수 있는 라거의 환상적인 맛은 카타리나의 장쾌한 성격과 닮아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빛나는 경기를 만들어냈던 그이들의 미소를 떠오르게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났다. 고생한 이들 모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추신 : 이제는 더 이상 수많은 ‘카타리나들’의 헌신으로 세상이 유지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 호방함과 풍성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다. 은빛 찬연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김경애, 김선영, 김영미, 김은정, 김초희를 포함해 컬링 여성대표팀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에 분노한다. 딱 한번만 사용될 경기장을 위해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희생당한 가리왕산의 상처에 눈물이 흐른다. 연맹의 구조적 문제는 덮어놓은 채 선수들에게만 원색적인 비난이 가해졌던 스피드 스케이팅이 안타깝다. 강요된 희생 속에서 피어오른 꽃을 환호하며 꺾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Tip!
명성에 비해 비텐베르크는 참 작고 한적하다. 베를린에서 당일치기 혹은 1박 정도의 일정을 계획하고 다녀오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 기차여행을 추천한다. 한국과 다른 스타일의 독일 기차를 경험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4인칸, 복도형, (무궁화호와 비슷한)객실형 등 다양한 좌석이 공존한다. 또 좌석제가 아니므로 원하는 곳에 앉으면 된다. 열차내에서 표를 살 수 있으니 급할 땐 일단 타시길! 단, 더위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분들은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독일열차 대부분은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차창 밖 경치를 볼 수 있긴 하다.
중요 포인트를 집중 공략하는 가운데 사진촬영 직후 철수하는 여행객들은 대개 반박문이 걸렸던 성(城)교회 정문 앞과 루터하우스 정도를 들른 후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펴보자. 교회 내에 있는 루터의 설교단과 묘지석, 여러 형태의 기독교개혁가의 상들을 만날 수 있다. 또 루터의 생각에 언어와 구조를 형성해준 멜랑히톤의 집과 기독교개혁사상의 산실이었던 비텐베르크 대학도 찾아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면 필시 목이 마를 것이다. 이때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비텐베르크 비어가르텐에 들려 라거 한 잔을 쭉! 들이켜면 상황종료! 첫맛의 상쾌함과 시원한 목 넘김이 다소 개성 없는 느낌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곳은 80명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소담한 뜰이고, 외부 음식을 안주 삼아 먹을 수 있다. 정원 구석엔 어린이 놀이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가족이 함께 가도 좋겠다. 그곳은 이전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들의 숙소이기도 했다. 하여 이층에 이어진 방문 앞에는 ‘누구누구 교수의 방’이라는 안내가 붙어있기도 하다. 카타리나 폰 보라의 초상화를 그렸던 루카스 크라나흐 작품전도 빼먹기엔 아쉽다.
- 3월 두 번째 이야기 : 홉을 아시나요? (맥주의 어머니 힐테가르트 수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