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목사의 수도원 맥주를 탐하는 지식
셋, 맥주는 순수하라! 단 왕실과 교회는 예외! :
- 바이에른의 수도원 양조장, 호프브로이하우제, 그리고 맥주순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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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후대의 사회학자가 이 시간에 대해 평할 때, 아마도 ‘날아가는 물잔’, ‘갑질 폭로’ 등의 단어들이 그 한 축을 장식하게 되지 않을까싶다. 천재란 상식을 깨는 발상을 하는 사람이고, 발명가는 그 발상을 실행에 옮기는 이가 아닐까? 그렇게 보았을 때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항공사 모 전무님은 그야말로 ‘천재적 발명가’라 아니할 수 없다. 범인(凡人)들은 그저 물 마시는 도구로만 생각했던 컵을 화풀이 수단으로까지 발상의 전환을 이뤘고, 이를 당당히 사람에게 집어던지는 실행력까지 겸비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정지해있는 물건을 ‘비행’하게 했으니, 항공사 중역으로는 그야말로 적임자가 아닌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천재적 발명가에게 ‘인간은 누구나 인권을 가진다’라는 보편적 근대성이 탑재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겠다. ‘짐은 곧 국가’라는 전근대성에 의거, 직원들을 비인격적 존재로 대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 ‘땅콩회항’, ‘공사현장 욕설지도’ 등 그간 밝혀진 사건만을 놓고 볼 때, 이와 같은 근대성의 결여, 즉 ‘몰상식’은 모 전무님을 포함한 총수 가문전체의 가훈이지 싶다.
생각해보면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왔을 그들의 행태에 대한 증언과 폭로는 대한민국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근대로 이행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력한 사람에게 온당한 결과가 있어야한다는 상식보다 ‘내가 마! 느그 서장하고 다했어!’식의 혈연, 지연, 학연 보유 유무가 통용되어온 이 사회의 전근대성, 그 구시대성의 해체 말이다.
유럽사회에 있어 근대의 연원은 어디일까? 나는 그 출발점을 흔히 종교개혁이라 명명하는 서구의 기독교개혁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이름’이 곧 법이었던 시대, 신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사제와 교회권력, 그리고 그들과 이권을 나눠가진 정치권력을 향한 저항은 그저 백성이었던 이들이 인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개혁은 오랜 시간에 걸쳐 유럽의 거의 전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사회적사건이다. 바이에른 공국과 수도 뮌헨은 그 중요 무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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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인 지금의 단일 국가 독일은 오랜 시간 동안 도시, 봉건영주 혹은 패권 국가들의 영향력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 자유도시와 한자동맹이 발달했던 북부와 달리 남부는 바이에른 공국 등 봉건국가의 지배력이 강했다. 기독교 개혁이 진행되던 시기,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확대되던 북부, 중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부는 가톨릭 전통을 고수했다. 여기에는 우선 바티칸과의 지리적 근접성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요인은 중부에서 시작되어 한때 바이에른을 넘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까지 치달았던 프로테스탄트 농민군에 경악한 지배세력들의 결심에 있었다. 그들은 가톨릭과의 유착이 민중지배에 더 용이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정치적 색깔이 달랐던 북부와 남부는 이제 종교적으로도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이에른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요충지로 부상하게 된다. 정치세력과 교회는 ‘애국’과 ‘신앙의 자유’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바이에른은 이 두 명분의 합류지점이 되었다.
1597년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 한 복판, 카를 광장에 한 성당건물이 오랜 공사를 끝내고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압도적 크기와 화려함이 인상적인 이 성당 내부 제대 뒤편에 웅장한 미카엘이 그려져 있었다. 악마와의 전쟁을 이끄는 수호천사 미카엘을 소환시켜야 했을 만큼 프로테스탄트와 농민군의 남진(南進)은 저지되어야 할 사명이었던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고 있었던 수도원에 대한 대폭적 지원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 강화를 꾀했던 것도 이때의 일이다. 민중지배와 교회수호의 의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바이에른 공국은 바티칸을 향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신의 대리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압도적인 신라군의 위세에 밀릴 수 없었던 영화 ‘황산벌’의 백제 결사대진영에서 ‘쩌그 보성, 벌교 쪽’에 SOS를 날리는 것과 유사하달까? 이에 바티칸은 ‘성(聖) 파울라의 제자회’의 수사들과 같이 순도 100% 가톨릭 신앙인들을 파견하게 된다. 이탈리아에 기원을 둔 수도원들의 바이에른 분원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남부와 북부는 상당한 이질감이 존재했다. 또 이후 발흥한 북부의 프로이센에게 굴욕(패배한 바이에른 왕이 친필로 ‘프로이센 왕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편지를 쓸 것과 이를 유럽 전 지역으로 발송할 것을 강요당한 사건)을 당한 바이에른에서는 이질감을 넘어 적대적 감정마저 일게 되었다. 하지만, 갑!툭!튀! 망언과 군사대국화 정책으로 영 불편한 일본인 반면, 한 사진 한다 싶을 땐 접사는 니콘이네, 손맛은 역시 캐논이네를 언급함과 같은 것일까? 그토록 불편한 북부이지만, 바이에른 사람들은 북부지역의 맥주에는 탄복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30년 전쟁으로 북부의 생산기반이 모두 파괴되기 이전까지 남부는 맥주에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실과 귀족들은 앞 다투어 북부의 맥주를 수입해서 마셨고, 이는 국가 재정 적자를 발생시킬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국가 최고의 주당이었던 국왕 빌헬름5세에 의해 대대적인 품질향상 정책이 추진된다. 그 이름도 유명한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에 강제성을 더한 것이었다.
하루에 최소 샘플 6개를 관능검사 할 것. 검사를 행하는 자는 시음 전날 밤에는 맥주나 와인을 과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관능검사 당일에는 미각을 마비시킬 만한 음식물도 삼가야 한다. 예컨대 소금에 절인 짠 생선이나 맛이 강한 치즈, 사탕과자 등을 먹으면 안 된다. 물론 코담배와 씹는담배도 포함하여 흡연을 엄금한다.
지금도 지켜지고 있는 품질 검사지침에서 볼 수 있듯, 당시의 바이에른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맥주품질향상정책을 추진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리, 홉, 물(당시엔 효모의 존재를 몰랐으니까)로 만든 것만 맥주로 인정한다는 이 법령은 예외조항에 근본적인 문제를 담고 있었다. ‘단, 교회와 왕실 양조장은 예외!’ 보리만을 원료로 인정한다는 맥주 순수령에 의해 평민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바이에른 전통의 밀 맥주 양조장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 무주공산이 된 밀 맥주 사업은 독점적 권한을 보장받은 권력에게 접수되어갔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온 수도원들의 ‘토지와 안정적 주류 판매 보장’ 요구에 대한 정치세력의 화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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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맥주’하면 흔히 밀 맥주와 옥토버훼스트 축제를 떠올릴 것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밀 맥주 중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마도 ‘바이헨슈테판’과 ‘파울라너’가 아닐까싶다. 이 중 바이헨슈테판은 725년에 설립된 베네딕트 수도원 양조장에 그 기원을 둔다. 최초 수사들의 단조로운 일상에 소소한 행복을 전해주었을 이 맥주는 국가와 교회의 비호 속에 거대 양조장으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수도원 양조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거대 맥주회사가 되어있기도 하다.
파울라너는 바이에른에 파견되었던 ‘성(聖) 파울라의 제자회’수사들이 빚은 맥주이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얻어낸 독점적 권한을 십분 이용하여 뮌헨과 그 일대의 밀 맥주 유통을 장악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었다. 수도원 양조의 전통은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는 수사의 옆얼굴이 인상적인 파울라너 로고에 남아있다.
한편 ‘호프브로이하우제’는 바이에른 왕실이 북독일 양조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해서 설립한 양조장 맥주를 판매했던 술집이다. 이 역시 정권의 강력한 후광이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겠다. 이들 거대 맥주 집들은 애초 귀족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출발했다가 이익증대를 위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편하게 찾아와 맥주 한 잔을 나누며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소통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점차 시민들의 정치적 소통공간이 되어갔다. 시민을 통제해 설립된 공간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모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역사적 아이러니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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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홀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장이었는가는 아돌프 히틀러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시킬 국가주의를 구상하던 히틀러는 대중적 지지를 증폭시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고심했고, 호프브로이하우제가 지목되었다. 1920년 2월24일에 있었던 나치의 첫 집회는 그 ‘술집’에서 열렸고, 이를 시발점으로 뮌헨 전 지역의 비어홀에서 발생했던 폭동을 주도하며 세력을 키운 나치와 히틀러는 마침내 정권찬탈과 일당독재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사실 나찌가 아니더라도 이미 독일 전역에는 이른바 ‘가-텐비어(Garten Bier)’로 불리는 맥주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공간들은 점차 군중의 정치적 논의장소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동가들과 각종의 조직가들 모두 맥주를 만남과 연대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저 유명한 로자룩셈부르크의 전쟁 국채 발행 반대 및 반전 연설장소가 뮌헨의 ‘킨들 홀’이었던 이유, 바이에른 인민공화국을 선언한 노동자, 군인들의 본부가 ‘마테저브로이 호프’였던 점, 나치의 창당대회가 술집 ‘슈테어네커브로이’에서 열리게 된 배경에는 바이에른 및 독일 전 지역의 문화-사회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호프브로이하우제에서는 나치와 사회주의자들이 맥주잔을 들고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히틀러 폭살(爆殺)이 시도되었던 장소 역시 맥주 집이었다. 이후로도 독일좌파의 중심이 ‘뷔에거브로이켈러’라는 비어홀이었던 점 등 독일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의 상당부분은 ‘맥주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집권세력은 때때로 비어홀이나 둘 이상이 모여 맥주마시는 것을 규제하려 들었다. ‘맥주 집’ 정치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던 나치는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알코올은 아리안의 적’이라는 선동문구를 들고 대중 술집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렇듯 독일의 맥주는 그냥 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들의 생계수단 혹은 삶의 현장이었고, 지배자들의 욕망이 서린 것이기도 했다. 또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고, 탄압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바이에른의 수도원들은 질 좋은 맥주의 보존과 생산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정권과 결탁하여 사업의 확대를 꾀하기도 했다. 마트 할인코너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아름다운 아이들은 그 길고 긴 맥주의 강을 지나 우리에게 향취와 함께 함께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유럽 사회의 근대정신은 맥주의 강가에서 벌어진 사건이기도 하다.
5월 네 번째 이야기 : 유럽의 우금치, 잘츠부르크
(아우구스티너 수도원 양조장, 그리고 잘츠부르크 농민전쟁)